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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소비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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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
작성일26-10-02 21:51 조회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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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소비한다는 말을 들으면 누군가의 이야기를 재미로 듣거나,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화제로 삼는 일을 먼저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사람을 소비하는 일은 그것보다 훨씬 넓은 곳에서 일어난다.


한 사람의 삶에서 내가 필요한 부분만 잘라내고, 

그것을 그 사람 전체인 것처럼 사용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사람을 소비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요즘은 영상을 짧게 잘라 보는 일이 많다.


몇 분짜리 영상에서 몇 초만 잘라내어 하나의 짤을 만들고, 그 장면에 제목을 붙인다.


원래 영상에는 그 말을 하기 전의 맥락도 있었고, 

그 말을 한 뒤의 표정도 있었고,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몇 초만 떼어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화를 낸 장면 하나만 보면 공격적인 사람이 되고, 

울고 있는 장면 하나만 보면 감정적으로 약한 사람이 된다.


실수한 장면 하나는 무능한 사람으로, 

누군가에게 의지한 장면 하나는 의존적인 사람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


영상은 몇 초로 편집되었을 뿐인데, 

어느 순간 그 몇 초가 그 사람의 전부가 된다.


사람의 삶도 그렇게 편집된다.


기사도 마찬가지다.


물론 여러 사실을 확인하고 서로 다른 입장을 균형 있게 다루는 기사도 있다.


하지만 때로는 이미 하나의 방향을 정해놓고 그 방향에 맞는 사실을 골라 배열하는 경우도 있다.


같은 사건을 다루더라도 어떤 사실을 앞에 놓느냐, 

어떤 말을 제목으로 뽑느냐, 무엇을 생략하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모습은 전혀 다르게 보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사람은 한 명의 복잡한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기사에서 만들어진 하나의 인물이 된다.


범죄 수사나 취조에서도 비슷한 일이 생길 수 있다.


처음부터 특정한 사람이 범인이라는 가설을 정해놓고 그 가설을 확인하기 위한 질문을 반복한다면, 

질문은 진실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이야기에 맞는 답을 얻기 위한 것이 될 수 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가 아니라

“그랬던 것 아닙니까?”


라는 질문이 반복되면, 사람의 진술조차 하나의 결론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사용될 수 있다.


이때 소비되는 것은 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사람의 말과 경험이 가진 의미다.


이미 정해놓은 이야기에 필요한 부분만 가져오는 것이다.


상담에서도 이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상담자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그 사람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이해하려고 한다.


어린 시절의 경험을 살펴보고, 관계의 패턴을 보고, 감정과 사고의 방식을 살펴본다.


그 과정에서 이론과 진단은 분명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구나.”


라는 결론이 먼저 자리를 잡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다음부터는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을 그 결론에 맞춰 보게 되기 때문이다.


ADHD라는 진단을 받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을 ADHD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일을 하지 못한 것이 진단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 일이 자신에게 의미가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너무 지쳐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 환경이 맞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진단은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언어일 수 있지만, 

그 사람을 대신하는 이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보다 진단명이 먼저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 

그 사람의 다른 가능성들은 보이지 않게 된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이해하는 것과 사람을 규정하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해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내가 알게 된 것을 가지고 그 사람을 조금 더 잘 바라보는 일이다.


규정한다는 것은 내가 알게 된 것을 그 사람의 전부로 만들어버리는 일이다.


그리고 사람을 소비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 사이에서 일어난다.


그 사람의 삶에서 내가 필요한 부분을 골라내고,

그 부분으로 그 사람을 설명하고,

그 설명을 다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


그러다 보면 한 사람은 어느 순간 이야기가 된다.


“저 사람은 원래 그래.”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야.”

“그 사람은 이런 문제가 있어.”


한 번 만들어진 이야기는 이후의 모든 행동을 해석하는 틀이 되기도 한다.


조용히 있으면 무시한다고 하고,

말을 하면 공격적이라고 하고,

거리를 두면 회피한다고 하고,

도움을 요청하면 의존적이라고 한다.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이미 붙어 있는 이름이 먼저 작동한다.


나 역시 몇 년 전, 한 사건을 지나오면서 내가 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경험을 했다.


사람들은 내 삶 전체를 알고 판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본 것은 그 사건의 일부였고, 그들이 들은 것은 누군가가 전한 이야기의 일부였고, 

그들이 필요로 했던 것은 자신들의 판단을 설명해줄 몇 가지 장면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한 사람에서 하나의 이야기가 되었고, 그 이야기는 다시 하나의 평가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때 내가 경험한 것은 단순히 누군가에게 오해를 받은 일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소비되고 있었다.


내가 살아온 시간보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몇 장면이 중요했고, 

내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보다 그들이 만들어낸 설명이 더 오래 남았다.


사람에게 붙은 평가는 생각보다 오래간다.


한 번 만들어진 이야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고, 이후의 행동까지 그 이야기 안에서 해석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안다.


사람을 한 번의 장면으로 판단하는 일이 그 사람에게 얼마나 오래 남는지를.

한 번 만들어진 이야기가 얼마나 쉽게 사람의 이름이 되는지를.


그리고 아마 그래서 나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쉽게 가져다 쓰고 싶지 않은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삶을 내 생각을 증명하기 위한 사례로 만들고 싶지 않고, 

내가 이해한 몇 가지 사실로 그 사람을 완성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본 것은 그 사람의 삶에서 아주 작은 일부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내가 보지 못한 시간을 가지고 있다.


내가 만나기 전의 삶이 있고, 내가 떠난 뒤의 삶이 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마음이 있고, 나 자신에게조차 아직 설명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


그러니 한 사람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을 완전히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내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삶이 그 사람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사람은 영상의 몇 초가 아니다.


기사의 몇 줄도 아니다.


취조에서 얻어낸 몇 마디도 아니고,

하나의 진단명도 아니며,

누군가가 붙여놓은 평가도 아니다.


사람은 그 모든 장면 사이를 살아온 한 사람이다.


어쩌면 사람을 깊이 바라본다는 것은 그 사람을 더 정확하게 설명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본 것보다 그 사람이 더 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사람을 소비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쩌면 그런 것일 것이다.


내가 본 한 장면을 그 사람 전체로 만들지 않는 것.

내가 이해한 이야기를 그 사람의 삶 전체라고 믿지 않는 것.

그리고 내가 붙인 이름보다 먼저,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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