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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경험한 그 사람과 아이가 만나는 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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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
작성일26-10-07 13:54 조회1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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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을 하면
배우자로서의 관계는 끝난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그 사람이 여전히 부모로 남는다.


부부로서의 관계는 끝나도

아이에게 아버지는 여전히 아버지고,

어머니는 여전히 어머니다.


그래서 이혼 후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게는
한 가지 어려운 일이 생긴다.


내가 배우자로서 경험한 그 사람과
아이가 부모로서 만나게 될 그 사람을
구분하는 일이다.


나는 그 사람과 함께 살면서
많이 힘들었을 수 있다.


배우자로서 기대했던 것을 받지 못했을 수도 있고,
상처를 받았을 수도 있고,
더 이상 함께 살 수 없을 만큼
관계가 힘들었을 수도 있다.


그 경험은 분명 나의 경험이다.


그러나
내 배우자로서 나에게 나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곧 아이에게도 나쁜 부모였다는 뜻은 아니다.


반대로
아이에게 좋은 부모였다는 사실이
그가 좋은 배우자였다는 뜻도 아니다.


한 사람은
관계에 따라 전혀 다르게 경험될 수 있다.


나에게는 매우 힘든 배우자였지만
다른 사람을 만나서는 잘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다정한 친구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어려운 동료일 수도 있다.


같은 사람을 두고도
누군가는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고
누군가는 나쁜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렇다면
그 사람을 한마디로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것보다
그 사람이 나와 어떤 관계를 맺었고,
그 관계에서 나는 그를 어떻게 경험했는가
를 보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특히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는
이 구분이 중요하다.


아이들은 부모를
부모의 전체 모습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무엇을 해주었는지,
어머니가 자신에게 얼마나 시간을 내주었는지,
누가 자신을 안아주었고
누가 무엇을 사주었는지를 기억한다.


그러나 부모가 그 행동을 하게 된
모든 사정과 동기까지 알 수는 없다.


한 부모가 아이에게 많이 베푼 것에도
여러 가지 동기가 있을 수 있다.


아이를 사랑해서였을 수도 있고,
자신이 부모에게 받지 못했던 것을
아이에게 주고 싶어서였을 수도 있다.


아이에게 인정받고 싶었을 수도 있고,
자신의 부족함이나 죄책감을
아이에게 잘해주는 것으로 보상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자신의 가치관이나 신념 때문에
아이에게 더 많이 주었을 수도 있다.


반대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바깥에서 고군분투했던 부모의 행동에도
여러 동기가 있을 수 있다.


가족을 사랑해서였을 수도 있고,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싶어서였을 수도 있다.


가족에게 인정받고 싶었을 수도 있고,
경제적으로 성공해야 한다는 자신의 기준을
가족에게 증명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가족을 위한 희생처럼 보이는 일이
자신의 불안이나 욕구를 해결하는 방식이었을 수도 있다.


겉으로는 같은 행동처럼 보여도
그 행동을 선택한 사람의 마음까지
아이에게 그대로 보이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부모와 자녀가 살아온 시대가 다르다면
같은 행동의 의미도 달라질 수 있다.


우리 사회는
한 세대가 살아가는 동안에도
사회 전체가 크게 변해왔다.


전쟁 직후의 어려운 환경을 지나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경험했고,
도시화와 민주화, 정보화를 거치면서
삶의 기준도 빠르게 달라졌다.


특히 한국의 경우
전통적인 유교적 관계문화가 정서 깊숙이 남아 있는 가운데
서구에서 들어온 개인주의와 자기결정의 가치가
짧은 시간 안에 함께 자리 잡았다.


조부모 세대에게는
가족을 지키고 먹고사는 것,
부모와 자녀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
삶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였을 수 있다.


부모 세대는
교육과 성취, 경제적 안정,
가족을 위한 희생을 중요한 가치로 배우며 살아왔을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의 자녀 세대는
개인의 선택과 감정,
자기 삶의 만족과 관계의 질,
자신의 경계를 존중하는 것을
훨씬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래서 부모에게는

“내가 너희를 위해 이렇게까지 했는데.”

가 사랑의 표현일 수 있지만,


자녀에게는

“그건 부모가 선택한 삶이잖아.”

가 될 수도 있다.


부모에게는
희생과 책임의 언어가 익숙한데
자녀에게는
선택과 경계의 언어가 더 익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어느 한쪽의 언어가
반드시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부모는 부모가 살아온 시대의 기준으로 행동했고,
자녀는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기준으로
그 행동을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가 부모를 기억하는 방식은
틀렸다기보다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부모의 행동을 본다고 해서
그 행동의 모든 동기를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부모가 살아온 시대의 맥락까지
온전히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한 부모의 해석까지 더해지면
아이의 경험할 자리가 더 좁아질 수 있다.


“너희 아버지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너희 어머니는 자기밖에 몰라.”

“내가 살아보니 저 사람은 믿을 사람이 아니야.”


이 말에는
그 말을 하는 부모의 경험과 감정이 들어 있다.


그 감정이 틀렸다는 뜻은 아니다.


그 사람에게는 정말 그렇게 경험되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 경험을 아이에게 그대로 건네는 순간
나의 관계에서 만들어진 해석이
아이의 관계를 대신 규정할 수 있다.


그때 아이는
자신의 눈으로 부모를 만나기도 전에
한쪽 부모가 경험한 부모를 먼저 만나게 된다.


더구나 아이에게 부모는
자신의 일부이기도 하다.


아이는 부모에게서
각각 다른 것을 받고 살아간다.


그런데 한 부모가 다른 부모를 지속적으로 부정하면
아이에게는 또 다른 어려움이 생길 수 있다.


‘엄마가 저 사람을 싫어하는데
나는 아빠를 좋아해도 되는 걸까.’

‘내가 아빠를 닮았다면


엄마는 나의 이 부분도 싫어할까.’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부모를 좋게 보라고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나쁘게 보라고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아이가 자신의 경험으로
그 부모를 알아갈 수 있는 자리를 남겨주는 것이다.


물론 아이를 보호해야 할 상황이라면
필요한 정보를 알려주고
분명한 경계를 세워야 한다.


그러나 배우자로서의 갈등과
부모로서의 관계를 구분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내가 경험한 그 사람을
아이의 경험까지 대신 정의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그 사람과 살면서
이런 배우자를 경험했다.


그것은 나의 진실이다.


하지만 아이가 그 사람을 만나며
어떤 부모를 경험할지는
아이의 몫이다.


내 관계와 아이의 관계는
같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한 사람을 한 가지 모습으로만 규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람을 용서하는 일이 아니라
각자의 경험을 각자의 자리로 돌려놓는 일인지도 모른다.


내가 경험한 그 사람과
아이가 만나는 그 사람.

그 둘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이혼 후에도
아이에게 부모를 부모로 경험할 수 있는
자리를 남겨주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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