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보는 줄만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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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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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키우는 동안 나는 늘 내가 아이를 바라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이가 잘 지내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살피고, 어려움이 있으면 도와주고,
아이가 힘들 때 곁에 있어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돌봄의 방향은 자연스럽게 부모에게서 자녀에게로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내가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만큼 아이들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딸은 내가 컴퓨터를 잘 다루지 못하거나 홈페이지에 문제가 생기면 먼저 살펴주곤 한다.
센터 홈페이지를 처음 만들었을 때도 가장 먼저 들어와 보고 오류를 찾아주었다.
내가 무엇을 부탁하면 바로 해결해주는 딸에게서는 ‘엄마, 내가 해줄게’라는 든든함을 느낀다.
아들은 조금 다르다. 처음에는 도와주지만 다음에는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방법을 알려준다.
한 번 해주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다음에는 내가 직접 할 수 있도록 건네주는 것이다.
예전에 내가 사람을 잘 믿고 때로는 이용당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는,
공항에 데려다 달라는 부탁을 하면서 “택시비 드릴 테니 공항에 태워주실래요?”라는 식으로 농담을 한 적도 있었다.
그 말에는 마치 “엄마, 이런 식으로 하면 나 같은 아들도 엄마를 이용할 수 있어요”라는 웃음이 담겨 있었다.
그때는 그저 아들의 센스 있는 농담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아보니 그 말 속에는 엄마를 오래 바라본 아이의 시선이 있었다.
나는 내가 사람을 살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들도 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사람을 믿는 방식도, 먼저 베풀고 알아서 돕는 습관도,
때로는 그것 때문에 곤란을 겪는 모습도 아이들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알고 있었다.
특히 오늘 아침에는 나의 순진성에 대해 생각했다.
세상을 조금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사람을 먼저 믿는 성향이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생각하다가,
시골에서 자라 공동체 안에서 먼저 베풀고 눈치껏 서로를 돕던 습관이 떠올랐다.
그런 방식이 도시의 관계에서는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고,
때로는 호의가 이용당하는 경험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 아들이 떠올랐는데, 저녁에는 오랜만에 아들에게서 먼저 전화가 왔다.
거의 내가 먼저 전화를 걸어왔던 터라 반갑고 조금 들뜨기까지 했다.
그제야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내가 무엇을 해주었는지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이들도 그동안 나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있었는데 말이다.
오늘 만난 내담자의 이야기도 비슷한 결로 마음에 남았다.
그 내담자가 다른 지역에서 시험을 치르게 되었는데,
두 딸이 엄마를 응원하고 맛있는 것도 챙겨주려고 시험을 치르는 지역까지 함께 따라갔다고 했다.
아마 그 딸들도 고3 시절에는 엄마가 시험장까지 데려다주고,
시험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시험을 마치고 나온 아이에게 맛있는 것을 먹였을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이제는 나이가 든 엄마가 시험을 치르러 가고,
아이들이 엄마를 따라가 응원하고 먹을 것을 챙겨주고 있었다.
돌봄의 방향이 바뀐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단순히 역할이 뒤집힌 것이라고만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돌봄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그 방향이 오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부모가 자녀를 돌보는 것처럼 자녀도 부모를 돌볼 수 있다.
다만 그 돌봄이 건강하려면 서로의 삶을 대신 살아주지는 않아야 한다.
부모가 자녀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지만,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까지 자녀에게 넘기지는 않는 것.
자녀가 부모를 돌볼 수 있지만, 부모의 정서적 책임까지 떠맡지는 않는 것.
그래서 상담실에서 만나는 ‘철없는 부모’, ‘받으려고만 하는 부모’의 문제도 어쩌면
단순히 누가 누구를 돌보느냐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돌봄의 책임이 누구에게 놓여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아이에게서 도움을 받는 것과 아이에게 나를 책임지게 하는 것은 다르다.
아이가 부모를 챙기는 것과 부모가 아이에게 자신의 빈자리를 채워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다르다.
건강한 관계에서는 돌봄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기도 하고,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각자의 삶은 각자가 살아간다.
어쩌면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깊어진다는 것은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부모가 아이를 바라본다.
아이의 손을 잡고 길을 건너고, 아픈 곳을 살피고, 아이가 넘어지지 않도록 곁을 지킨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이가 자란다.
그리고 부모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아이 역시 엄마를 바라보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엄마, 내가 보고 있어요.”
그 말은 엄마를 판단한다는 뜻이 아니다.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는 뜻이다.
내가 아이를 오래 바라본 것처럼, 아이도 나를 오래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단순히 ‘내가 아이를 키웠다’는 이야기로만 설명하기 어려워졌다.
돌아보면 아이들도 나를 키우고 있었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돌아보게 하고, 내가 나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게 하고,
때로는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나를 보여주기도 했다.
나는 내가 아이들을 바라보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돌아보니,
아이도 나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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