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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에서 보폭을 맞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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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
작성일26-08-25 18:20 조회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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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운동을 하면서 이전과 다른 편안한 경험을 했다. 

운동 강도가 낮은 것은 아니었다. 

분명 몸에 힘이 들어가고 조금은 힘든 단계였는데, 이상하게도 ‘할 만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 그런지 생각해보니 힘든 동작에 갑자기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동작이 낮은 단계에서 시작해 조금씩 강도가 높아지고, 

그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몸이 앞의 단계를 충분히 경험한 뒤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문득 상담도 되도록 이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담에서도 어떤 내담자를 만나면 이야기가 참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처음에는 가벼운 이야기로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조금 더 깊은 이야기가 나오고, 

그 이야기가 다시 감정이나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상담자가 특별히 끌고 가지 않아도 내담자가 자기 힘으로 한 걸음씩 나아간다.


그런데 어떤 내담자를 만나면 묘하게 어긋난다. 

내가 한 걸음 나아가려 하면 내담자는 아직 그 자리에 있고, 

내가 기다리고 있으면 내담자가 갑자기 몇 걸음을 건너뛰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상담의 진도가 더디게 느껴지기도 하고, 반대로 내가 앞서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관계에서 보폭을 맞춘다는 것은 단순히 상대방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가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지금 내딛을 수 있는 바로 다음 한 걸음을 알아차리는 것에 더 가깝다.


상담자가 


“지난번 상담 이후에는 어떠셨어요?”

라는 질문에 “별일 없었어요.”라고 한다면 또 한 걸음.


“그냥 평소처럼 지내셨어요?”

그렇게 작은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면 내담자에게서 다음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다.


상담자가 알고 있는 깊이로 내담자를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내담자가 지금 있는 곳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도록 함께 걷는 것이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내담자가 “서운했어요.”라고 말했을 때 “서운하다는 게 어떤 느낌일까요?”라고 바로 묻는다면 오히려 막막할 수 있다. 

그 사람에게는 아직 감정을 세분화해서 바라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그때 제일 마음에 걸렸던 건 뭐였어요?”, “그 순간 어떤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처럼 

지금 내담자가 사용할 수 있는 언어에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상담에서 중요한 것은 깊은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담자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통해 다음 경험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에게도 보폭이 흔들리는 순간이 있다.


상담 중반까지는 비교적 내담자의 속도를 잘 따라가다가, 

후반부가 되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직 이야기가 한창 펼쳐져 있으면 마음이 급해진다. 

‘이제 정리를 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들면서 나도 모르게 한두 걸음 앞서가는 것 같다.


어쩌면 그때 필요한 것은 더 빨리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은 여기까지 펼쳐진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허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상담이 하나의 회기 안에서 완결될 필요는 없다. 

어떤 이야기는 그날 처음 펼쳐졌다는 것 자체가 다음 상담을 위한 중요한 시작일 수 있다. 

상담자가 서둘러 의미를 붙이고 정리해버리면, 내담자가 막 발견한 경험이 다시 상담자의 언어 속으로 접혀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후반부에는 오히려 조금 일찍부터 정리의 보폭을 만들어주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오늘 이야기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지금 이야기 중에서 마음에 남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걸까요?”

“이 부분은 다음에 조금 더 이어서 봐도 좋겠어요.”


이런 말들은 상담을 갑자기 끝내는 것이 아니라, 

펼쳐진 마음에 다음 시간으로 이어지는 작은 길을 만들어주는 것일 수 있다.


나는 상담뿐 아니라 삶의 관계에서도 이런 전환 단계가 있는 만남을 원한다.


처음부터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관계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가벼운 이야기에서 조금 더 의미 있는 이야기로, 

서로를 알아가는 데서 마음을 나누는 데로, 편안하게 함께 있는 데서 서로의 삶에 조금씩 들어가는 데로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는 관계.


그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작은 전환의 단계들이 있는 만남이다.


어떤 사람과는 그 전환이 자연스럽다. 처음에는 그저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 순간 이야기가 깊어지고, 

어느 순간에는 서로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또 어느 순간에는 말하지 않아도 편안해진다.


반면 어떤 관계는 처음부터 너무 깊은 곳으로 들어가 버리거나, 

계속 표면적인 곳에만 머문다. 어느 쪽이든 어딘가 어색하다.


그래서 내가 바라는 관계는 빠르게 깊어지는 관계도, 끝없이 가벼운 관계도 아닌, 

서로의 보폭에 맞춰 자연스럽게 깊어지는 관계​인지 모르겠다.


사람마다 걸음의 크기도, 걸음의 속도도 다르다.


관계에서 보폭을 맞춘다는 것은 상대에게 맞춰 나의 걸음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갈 수 있는 속도와 상대가 갈 수 있는 속도를 함께 살피면서 두 사람이 실제로 함께 갈 수 있는 지점을 찾는 것이다.


어쩌면 좋은 관계란 같은 속도로 걷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다음 한 걸음을 기다려줄 수 있고, 필요할 때는 함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관계​인지도 모르겠다.


오늘 아침 운동에서 나는 힘든 동작을 잘 견딘 것이 아니었다. 

그곳까지 오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그 강도를 받아낼 수 있었다.


상담도, 관계도 그런 것 같다.


사람은 갑자기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 걸음씩을 지나며 깊어진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만남 역시 그런 것 같다.


가벼움에서 깊이로, 익숙함에서 친밀함으로,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전환이 있는 만남.


내가 해야 할 일은 상대보다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한 걸음 멈춰서서 서로의 걸음을 살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우리는 함께 다음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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