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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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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
작성일26-08-20 20:04 조회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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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홈페이지에 칼럼을 올리면서 새로운 탭 하나를 만들었다.


비밀글을 올릴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동안 홈페이지에 글을 쓰면서도 어딘가 작은 불편함이 있었다.


일기장에 따로 쓰기에는 지금 나누고 있는 생각들이 아깝고, 

그렇다고 홈페이지에 공개하기에는 아직 너무 사적인 이야기들도 있었다. 

나와의 대화 속에서 발견한 생각들을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는 않았기에 겸사겸사 홈페이지 칼럼란에 올렸지만, 

글을 공개하는 순간에는 늘 조금의 긴장이 남았다.


그런데 비밀글 탭을 하나 만들어놓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생각해보면 내가 필요했던 것은 어쩌면 중간 공간이었던 것 같다.


일기장은 너무 안쪽에 있고, 공개된 칼럼은 너무 바깥쪽에 있다.


그 사이 어딘가에 생각을 잠시 놓아둘 수 있는 공간.


쓰되 공개하지 않을 수 있고,
남기되 설명하지 않을 수 있고,
누군가와 나누고 싶지만 아직 세상에 내놓지는 않을 수 있는 공간.


그 공간을 만들고 나니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러다 문득 대상관계에서 이야기하는 중간 대상(transitional object)​이 떠올랐다.


도널드 위니콧은 어린아이가 엄마와 분리되어 독립적인 존재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곰인형이나 담요 같은 특정한 물건을 사용하는 현상에 주목했다. 

중간 대상은 엄마 그 자체도 아니고 완전히 아이 자신도 아니다. 

그 사이에 존재하면서 아이가 엄마와 분리된 현실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혼자서도 안전하게 세상을 탐색할 수 있도록 돕는다.


곰인형은 엄마가 아니지만 엄마와 연결되어 있는 느낌을 준다.


아이의 것이지만 아이 자신은 아니다.


그래서 아이는 곰인형을 가지고 ‘나와 엄마 사이’​라는 중간 영역을 경험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비밀글도 조금 비슷하다.


그 글은 분명 내 생각이고 내 경험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내 안에만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다. 

홈페이지라는 바깥 공간에 이미 존재하지만, 아직 다른 사람에게 공개되지는 않는다.


내 안과 세상 사이.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사이.
기록과 공개 사이.


그곳에 글이 잠시 머문다.


나는 그동안 무엇인가를 두 영역 중 하나로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공개할 것인가, 공개하지 않을 것인가.
말할 것인가, 말하지 않을 것인가.
내 생각인가, 다른 사람과 나눌 이야기인가.


그런데 비밀글이라는 공간을 만들어보니 그 사이에 머무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내가 상담에서 자주 이야기했던 회색지대와도 닿아 있다.


회색지대는 흑과 백 사이에서 결정을 못 내리는 애매한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아직 결정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를 견딜 수 있는 공간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공개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고 버릴 필요도 없다.


오늘의 생각이 내일의 칼럼이 될 수도 있고, 

끝내 나만 알고 있는 기록으로 남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괜찮다.


그 선택을 지금 당장 하지 않아도 된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최근 이야기했던 새로운 안정감과도 연결되는 것 같다.


예전에는 안전하려면 세상이 내가 생각한 방식대로 움직여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한 번 크게 흔들리고 나니 세상은 언제든 내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을 확실하게 통제하는 일이 아니라, 

불확실한 것과 확정되지 않은 것을 잠시 머물게 할 수 있는 공간을 갖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돈과 관련된 일이 애매하면 확인할 때까지 잠시 멈춰 있을 수 있고,
어떤 감정이 올라오면 당장 결론을 내리지 않고 바라볼 수 있고,
어떤 생각이 생기면 곧바로 세상에 내놓지 않고 비밀글이라는 공간에 놓아둘 수도 있다.


이런 공간이 생기면 마음이 덜 급해진다.


무언가를 반드시 결정해야 한다는 압박도 줄어든다.


어쩌면 사람에게는 안전한 안쪽과 위험한 바깥쪽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안과 밖을 오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중간 공간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린아이가 곰인형을 손에 쥐고 조금씩 엄마에게서 떨어져 세상을 향해 나아가듯이, 

나도 내가 발견한 생각들을 비밀글이라는 중간 공간에 잠시 놓아둔다.


그 글이 언제 세상으로 나갈지는 아직 모른다.


혹은 끝내 나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괜찮다.


내 생각을 세상에 공개하지 않아도, 그 생각을 소중하게 다룰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오늘 그 사실을 알게 되면서 조금 편안해졌다.


어쩌면 새로운 안정감은 모든 것을 안전하게 만들어놓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과 세상 사이에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중간 공간을 만들어가는 데서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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