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붙일 수 없었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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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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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실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우리가 흔히 감정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음의 가장 표면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누군가를 만나 화가 나고, 밉고, 서운하고, 불안하고, 두려울 수 있다.
우리는 이런 경험에 ‘화’, ‘미움’, ‘서운함’, ‘불안’과 같은 이름을 붙인다.
감정단어는 복잡한 마음의 경험을 잘게 잘라 우리가 다루기 쉽게 만들어준다.
마치 커다란 음식을 잘근잘근 씹어 삼킬 수 있는 크기로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감정단어를 조금 더 들여다보면 그 아래에 더 굵은 정서가 있다.
누군가에게 화가 나고, 계속 신경이 쓰이고, 피하고 싶고,
걱정된다면 각각의 감정 뒤에 하나의 큰 정서가 흐르고 있을 수 있다.
여러 감정의 조각을 하나로 묶어주는 불안이나 두려움, 외로움, 무력감 같은 정서다.
그래서 감정단어가 잘게 나누어진 마음이라면,
정서는 아직 덩어리로 남아 있는 마음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더 깊이 들어가면 감정이나 정서라는 말만으로는 충분히 설명하기 어려운 경험을 만나게 된다.
나는 그것을 정동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해 본다.
정동은 존재와 생존에 가까운 경험이다.
나는 안전한가.
나는 버려지지 않을 수 있는가.
나는 이곳에 존재해도 괜찮은가.
나는 나를 지킬 힘이 있는가.
나는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는가.
이 질문들은 특정한 사람이나 사건을 넘어선다.
그 아래에는 존재불안, 존재수치심, 존재죄책감, 존재무력감, 존재외로움과 같은 깊은 경험이 놓일 수 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화가 난다고 할 때도 그 화만 볼 수는 없다.
“저 사람이 싫다.”
라는 말 아래에
“저 사람 앞에서는 불안하다.”
가 있을 수 있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나는 안전하게 존재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상담실에 오는 내담자의 경험도 때로는 이런 깊은 층에서 시작된다.
말로 정리되지 못한 정동이 특정한 장면이나 이미지, 몸의 감각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때 장면이 아직도 생생해요.”
“그 사람만 보면 몸이 굳어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그때 생각만 하면 답답해요.”
이럴 때 상담은 그 장면에 성급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장면을 안전하게 다시 바라보면서, 그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천천히 찾아간다.
그때 몸에서는 무엇이 일어났는지, 무엇이 두려웠는지, 무엇을 원했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이름 없던 경험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그때 무서웠구나.”
“나는 외로웠구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무력했구나.”
“나는 내가 잘못된 사람이라고 느꼈구나.”
이렇게 정동이 정서로 드러나고, 정서가 다시 구체적인 감정의 언어를 얻는다.
그 순간 과거의 경험은 더 이상 나를 압도하는 이름 없는 덩어리로만 남아 있지 않는다.
내가 느꼈던 경험으로 이해되고, 내 이야기 속에 자리 잡기 시작한다.
그래서 상담에서 말하는 ‘소화’는 감정을 없애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소화되지 못했던 경험을 내가 이해하고 담을 수 있는 크기로 만드는 것에 가깝다.
감정단어는 마음을 잘게 나누어 준다.
정서는 흩어진 감정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해하게 한다.
정동은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내가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상담은 때로 그 깊은 곳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언어를 가지고 올라오는 과정이다.
정동을 만나고, 정서를 발견하고,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
그렇게 이름을 얻은 마음은 더 이상 나를 온전히 휘두르지 않는다.
어쩌면 마음이 가벼워진다는 것은 감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내가 그 감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감정은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니라, 더 깊은 곳에 있는 나를 만나러 가는 길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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