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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붙일 수 없었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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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
작성일26-08-22 21:15 조회4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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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실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우리가 흔히 감정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음의 가장 표면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누군가를 만나 화가 나고, 밉고, 서운하고, 불안하고, 두려울 수 있다. 

우리는 이런 경험에 ‘화’, ‘미움’, ‘서운함’, ‘불안’과 같은 이름을 붙인다. 

감정단어는 복잡한 마음의 경험을 잘게 잘라 우리가 다루기 쉽게 만들어준다. 

마치 커다란 음식을 잘근잘근 씹어 삼킬 수 있는 크기로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감정단어를 조금 더 들여다보면 그 아래에 더 굵은 정서가 있다.


누군가에게 화가 나고, 계속 신경이 쓰이고, 피하고 싶고, 

걱정된다면 각각의 감정 뒤에 하나의 큰 정서가 흐르고 있을 수 있다. 

여러 감정의 조각을 하나로 묶어주는 불안이나 두려움, 외로움, 무력감 같은 정서다.


그래서 감정단어가 잘게 나누어진 마음이라면, 

정서는 아직 덩어리로 남아 있는 마음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더 깊이 들어가면 감정이나 정서라는 말만으로는 충분히 설명하기 어려운 경험을 만나게 된다. 

나는 그것을 정동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해 본다.


정동은 존재와 생존에 가까운 경험이다.


나는 안전한가.
나는 버려지지 않을 수 있는가.
나는 이곳에 존재해도 괜찮은가.
나는 나를 지킬 힘이 있는가.
나는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는가.


이 질문들은 특정한 사람이나 사건을 넘어선다. 

그 아래에는 존재불안, 존재수치심, 존재죄책감, 존재무력감, 존재외로움과 같은 깊은 경험이 놓일 수 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화가 난다고 할 때도 그 화만 볼 수는 없다.


“저 사람이 싫다.”

라는 말 아래에

“저 사람 앞에서는 불안하다.”


가 있을 수 있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나는 안전하게 존재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상담실에 오는 내담자의 경험도 때로는 이런 깊은 층에서 시작된다. 

말로 정리되지 못한 정동이 특정한 장면이나 이미지, 몸의 감각​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때 장면이 아직도 생생해요.”

“그 사람만 보면 몸이 굳어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그때 생각만 하면 답답해요.”


이럴 때 상담은 그 장면에 성급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장면을 안전하게 다시 바라보면서, 그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천천히 찾아간다.


그때 몸에서는 무엇이 일어났는지, 무엇이 두려웠는지, 무엇을 원했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이름 없던 경험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그때 무서웠구나.”
“나는 외로웠구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무력했구나.”
“나는 내가 잘못된 사람이라고 느꼈구나.”


이렇게 정동이 정서로 드러나고, 정서가 다시 구체적인 감정의 언어를 얻는다.


그 순간 과거의 경험은 더 이상 나를 압도하는 이름 없는 덩어리로만 남아 있지 않는다. 

내가 느꼈던 경험으로 이해되고, 내 이야기 속에 자리 잡기 시작한다.


그래서 상담에서 말하는 ‘소화’는 감정을 없애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소화되지 못했던 경험을 내가 이해하고 담을 수 있는 크기로 만드는 것에 가깝다.


감정단어는 마음을 잘게 나누어 준다.


정서는 흩어진 감정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해하게 한다.


정동은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내가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상담은 때로 그 깊은 곳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언어를 가지고 올라오는 과정이다.


정동을 만나고, 정서를 발견하고,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


그렇게 이름을 얻은 마음은 더 이상 나를 온전히 휘두르지 않는다.


어쩌면 마음이 가벼워진다는 것은 감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내가 그 감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감정은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니라, 더 깊은 곳에 있는 나를 만나러 가는 길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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