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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이름일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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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
작성일26-08-23 08:40 조회3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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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비슷한 또래의 지인과 결혼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들었던 장면이 하나 있다.


그 지인에게는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윗동서가 있었다. 

시부모는 가족관계의 순서에 따라 지인에게 나이가 어린 윗동서를 ‘형님’이라고 부르고 존대하라고 했다. 

실제 나이와 상관없이 가족 안에서 윗동서는 형님이고, 지인은 아랫동서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두 사람이 만나면 묘한 장면이 펼쳐졌다.


나이가 어린 윗동서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지인에게


“동서, 00해.”


라고 말해야 했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하대를 하는 것이니 그 말투가 자연스러울 리 없었다. 

지인 역시 자신보다 어린 사람을 ‘형님’이라고 부르며 존대해야 했다.


아마 두 사람 모두에게 어색한 관계였을 것이다. 

한두 번이라면 가족의 관습이라고 생각하며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만날 때마다 실제 나이와 호칭, 말투가 어긋나는 장면을 반복해서 경험해야 한다면 그 관계 자체가 부담스러워질 수도 있다.


실제로 그 지인은 특별한 날이 아니면 시댁에 가지 않기 위한 궁리를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당시 나는 금강경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이름은 이름일 뿐이잖아.”


형님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나보다 나이가 많아지는 것도 아니고, 

동서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해서 그 사람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름은 관계를 구분하기 위해 붙인 하나의 이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나는 그 사람의 불편함에 먼저 공감했던 것 같다.


“그렇게 하는 게 불편하겠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내 말에 오래 머물기보다 곧바로


“그것 말고는 불편한 게 없어.”


라는 식으로 자신의 불편함을 축소했다.


나는 더 이상 그 이야기를 이어가지 않았다.


지금 돌아보면 그 사람에게는 ‘착한 사람’이라는 자기 이미지가 꽤 중요했던 것 같다.


착한 사람이라면 시댁이 불편하다고 말해서는 안 되고, 

가족관계 때문에 화가 나거나 불쾌하다고 인정하는 것도 마음에 걸릴 수 있다.


그래서 불편함을 인정하는 순간 자기 안에서 이런 두 가지가 충돌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착한 사람이다.”
“그런데 나는 시댁에 가기 싫다.”


둘을 동시에 받아들이기 어려우면 차라리 불편함을 작게 만드는 편이 마음은 편할 수 있다.


“그것 말고는 아무 문제 없어.”


그렇게 말하면 불편함은 인정하되, ‘착한 사람’이라는 자신의 이름은 지킬 수 있으니까.


돌이켜보면 그때의 관계에는 두 종류의 이름이 있었던 셈이다.


하나는 형님과 동서라는 관계의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착한 사람이라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름이었다.


그런데 이름은 처음에는 우리를 이해하고 관계를 정리하는 데 도움을 준다.


가족관계에서 형님과 동서라는 호칭이 필요한 것처럼,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수많은 이름을 사용한다.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이름이 사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이름에 맞춰져야 할 때 생기는 것 같다.


형님이니까 이렇게 해야 하고,
동서니까 저렇게 해야 하고,
착한 사람이니까 화를 내면 안 되고,
상처받은 사람이니까 이렇게 행동해야 하고,


불안한 사람이니까 이것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이다.


이름이 사람보다 앞서기 시작한다.


금강경을 공부하면서 내가 이해했던 “이름은 이름일 뿐이다”라는 말도 어쩌면 이런 의미였을 것이다.


형님이라는 이름이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고, 동서라는 이름이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다.


착한 사람이라는 이름도 마찬가지다.


나는 착한 사람일 수 있지만, 언제나 착하기만 해야 하는 사람은 아니다.


누군가가 불편할 수도 있고, 화가 날 수도 있고, 가기 싫을 수도 있다. 

그런 마음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선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여러 감정을 인정할 수 있을 때, 

‘착한 사람’이라는 이름으로부터 조금 자유로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상담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만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감정에 이름이 없어서 힘들어한다.


그럴 때는 이름을 찾아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때 정말 외로웠구나.”
“무서웠구나.”
“서운했구나.”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막연했던 경험이 선명해지고,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반대로 이미 붙어 있는 이름 때문에 힘들어한다.


“나는 원래 불안한 사람이야.”
“나는 상처받은 사람이야.”
“나는 버림받은 사람이야.”
“나는 착한 사람이야.”


이때는 새로운 이름을 붙이는 것보다 그 이름과 자신 사이에 거리를 만드는 일이 필요할 수 있다.


이름을 얻음으로써 경험을 이해하고,
이름을 풀어냄으로써 다시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


어쩌면 상담에서 이름을 다루는 일은 이 두 방향을 모두 포함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름은 필요하다.


그러나 이름이 나 자신이 되어서는 안 된다.


형님은 호칭이고, 동서는 관계의 이름이며, 착한 사람은 하나의 자기 이미지일 뿐이다.


이름은 이름일 뿐인데, 우리는 때때로 그 이름에 너무 많은 것을 얹는다.


그리고 그 이름을 지키느라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 이름에 맞는 역할을 요구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보게 된다.


그때 필요한 것은 이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이름과 사람 사이에 다시 작은 틈을 만들어주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 이름이 당신의 전부는 아니에요.”


어쩌면 그 한마디면 충분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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