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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 이후에 펼쳐지는 관계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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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
작성일26-08-23 11:10 조회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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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세상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처음 아이에게 세상은 아직 선명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다. 

배가 고프면 울고, 불편하면 울고, 편안하면 잠이 든다.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과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직 분명하게 나뉘어 있지 않은 시기다.


그러다가 아이의 세계에 ‘나 아닌 존재’가 들어온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존재는 엄마일 것이다.


배가 고플 때 나타나고, 울 때 안아주고, 불편할 때 달래주는 사람. 

엄마는 아이와 다른 사람이지만, 동시에 아이의 삶과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다. 

아이는 반복되는 경험을 통해 조금씩 알게 된다. 내가 울면 누군가가 오고, 

내가 불편하면 누군가가 알아차리고, 내가 편안해지는 데에는 다른 사람이 함께한다는 것을.


이렇게 아이에게 처음으로 관계의 감각이 생겨난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아이의 세계에는 아빠가 들어오고, 

형제자매가 들어오고, 가족이 아닌 사람들도 들어온다. 

익숙한 사람과 낯선 사람을 구분하고,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도 생긴다. 

그러면서 아이는 자신과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간다.


엄마가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이 다를 수 있고, 

친구가 좋아하는 것과 내가 좋아하는 것도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다. 

처음에는 그 차이가 불편할 수 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화가 나고,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면 서운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을 반복하면서 아이는 조금씩 관계를 배운다.


저 사람은 나와 다르지만 나를 좋아할 수 있고,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저 사람은 좋아할 수 있으며,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지만 상대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과정에서 아이는 타인을 알아가는 동시에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아간다.


우리는 흔히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마음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돌아보면 지금의 나는 처음부터 완성되어 있었던 존재가 아니다. 

누군가가 내 말을 들어주었던 경험, 내 감정을 알아주었던 경험, 

나의 욕구가 받아들여졌던 경험이 쌓이면서 ‘내 생각도 중요하구나’, ‘내 감정에도 자리가 있구나’라는 감각이 생겨난다.


반대로 감정을 표현할 때마다 무시당하거나 욕구를 드러내는 것이 어려웠던 사람은 

자신의 마음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먼저 살피는 법을 배울 수도 있다. 

혼자 해결하는 것이 안전했던 사람은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을 지킬 수도 있다.


그래서 한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그 사람이 살아온 관계들이 함께 들어 있다.


부모와의 관계, 형제자매와의 관계, 친구와의 관계, 

선생님과의 관계, 성장하면서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과의 경험이 조금씩 지금의 나를 만들어왔다.


그렇다고 내가 관계의 결과물에 불과하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영향을 받지만, 동시에 자신의 경험을 다시 해석하고 새로운 관계를 선택하면서 자신을 만들어갈 수 있다.


관계가 나를 만들고, 내가 다시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관계가 깊어진다는 것이 상대와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건강한 관계에는 나와 상대를 구분하는 경계가 필요하다.


나는 나이고 상대는 상대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한다. 

너무 가까워지면 상대의 감정이 내 감정처럼 느껴질 수 있고, 

반대로 지나치게 멀어지면 아무도 내 마음 안으로 들어올 수 없게 된다.


어쩌면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경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가진 채 연결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너와 다르다. 그러나 너와 무관하지 않다.


나는 나의 삶을 살아가지만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나 역시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준다.


상담실에서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느끼게 된다.


처음에는 개인의 성격이나 문제처럼 보였던 행동이, 

그 사람이 지나온 관계 속에서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필요했던 방식이었음을 발견할 때가 있다. 

지나치게 타인의 표정을 살피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해야 안전했던 관계가 있었을 수 있고,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 사람에게는 기대지 않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었던 시간이 있었을 수 있다.


그럴 때 상담은 ‘왜 나는 이런 사람인가’를 묻는 데서 조금 달라진다.


‘나는 어떤 관계를 지나오면서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


그리고 그 질문은 다시


‘이제 나는 어떤 관계를 만들어가고 싶은가.’


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아이의 마음이 태어나는 과정을 다시 생각해본다.


처음에는 자신의 감각으로 가득했던 세계에 엄마가 들어오고, 

그다음에는 아빠가 들어오고, 가족과 친구와 세상이 들어온다. 

아이의 세계가 넓어질수록 아이는 오히려 자신이 누구인지 조금씩 알아간다.


나 아닌 것들이 들어오면서 나의 형태가 생겨나는 것이다.


어쩌면 마음이 자란다는 것은 나와 다른 존재를 만나는 일이면서 동시에 그 관계 속에서 나를 발견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나이고 너는 너다. 우리는 같지 않다. 그러나 서로 무관한 존재도 아니다.


다르면서 연결될 수 있고,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나일 수 있다. 

영향을 받으면서도 나의 선택을 할 수 있고, 가까워지면서도 나를 잃지 않을 수 있다.


처음에는 세상이 나와 나 아닌 것으로 나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살아갈수록 그 경계 사이에 수많은 관계가 놓여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나는 조금씩 나의 모습을 만들어간다.


마음은 혼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태어나고, 

관계 속에서 계속 새로운 모습으로 자라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워진 자리는 텅 빈 공간이 아니라 다른 존재를 만날 수 있는 자리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다시 새로운 나를 발견한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에서 나의 형태를 계속 만들어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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