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포유
칼럼 포유
칼럼 포유

두고 온 나를 데리러 가는 일

페이지 정보

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
작성일26-08-23 15:05 조회40회 댓글0건

본문


시간이 널널한 날이면 어딘가에 두고 온 나를 만난다.


그 아이는 특정한 나이의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


잘 몰랐던 나,
미숙했던 나,
실수했던 나,
누군가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나,
그리고 살아보지 못한 나.


어린 시절 미숙한 상태에서 실수를 했을 때 혼난 경험이 있는 사람은 

성장한 뒤에도 자신의 실수 앞에서 쉽게 자신을 혼내거나, 방어하기 위해 변명이 앞선다. 

당시 자신을 향했던 책망의 목소리가 어느새 자기 안으로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왜 또 그랬어?”
“그러니까 잘했어야지.”
“이것도 못 해?”


이런 말들은 어른이 된 뒤에도 자기 안에서 반복될 수 있다.


때로는 그것을 ‘경험에서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지난 일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다그친다.


하지만 반면교사라는 좋은 말도 때로는 과거의 나를 계속 혼내는 방식이 될 수 있다.


두고 온 나를 데리러 간다는 것은 어쩌면 이 방식을 멈추는 일인지도 모른다.


과거의 나를 다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그래서 과거에 묶여 있던 자신을 자유롭게 해주는 일이다. 


그래서


“왜 그렇게 했어?”보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


라고 먼저 말해주어야 한다.


특히 이 문제는 가족상담에서 부모, 그중에서도 엄마가 자신의 양육을 돌아볼 때 자주 드러난다.


자신의 양육을 돌아보면서 한쪽으로는


“내가 아이를 잘못 키웠다.”
“내가 아이에게 상처를 줬다.”


하며 깊은 자책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반대로 너무 고통스러운 마음을 피하기 위해


“그때는 나도 어쩔 수 없었다.”
“나도 그렇게 배웠다.”
“그 상황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그런데 어쩌면 이 두 가지 모두 필요한 과정인지도 모른다.


먼저 그럴 수밖에 없었던 나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


그때의 내가 가진 경험과 지식, 양육에 대한 이해, 삶의 조건을 생각하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부분이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수용이 곧 면죄는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 내가 한 일은 모두 괜찮았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충분히 수용받고 나면 그때의 나를 조금 더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과정에서 아이에게 어떤 일이 있었을까?”

“나는 무엇을 몰랐을까?”

“무엇은 알고도 그렇게 했을까?”

“내가 힘들다는 이유로 아이에게 감당시키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몰랐던 것은 배울 수 있다.


잘못 알았던 것은 다시 배울 수 있다.


알면서도 잘못했던 것은 인정할 수 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아이에게 상처가 되었다면 그것을 애도할 수도 있다.


그래서 자기수용은 책임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책임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자책과 정당화 사이에 제3의 자리가 생기는 것이다.


“그때의 나를 이해한다. 그렇다고 그때 내가 한 일이 모두 옳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 자리가 중요하다.


자책에 빠지면 너무 아파서 내가 한 일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고, 

정당화에 머물면 내가 다른 사람에게 미친 영향을 바라보기 어렵다.


하지만 먼저 나를 안전한 자리로 데려오면, 

그때 비로소 내가 한 일의 책임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두고 온 나를 데리러 간다는 것은 나를 무조건 용서하거나 면죄하는 일이 아니다.


혼내느라 놓쳐버렸던 나를 먼저 안전한 자리로 데려오는 일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비로소 나에게 말하는 것이다.


“그래, 너도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


충분히 위로하고 지지한 뒤에야 다시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그때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함께 보자.”


이 순서가 중요한 것 같다.


위로와 지지가 먼저이고, 성찰은 그다음이다.


위로받지 못한 상태에서 ‘이랬어야 했다’는 말을 들으면 그것은 또 하나의 책망이 된다. 

하지만 충분히 지지받은 뒤에 듣는 ‘이랬어야 했다’는 말은 나를 혼내는 말이 아니라 배움이 될 수 있다.


수용은 면죄가 아니고,
책임은 책망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가 과거의 나를 데리러 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과거의 나를 데려와야 그때의 나를 제대로 볼 수 있고,
그때의 나를 제대로 볼 수 있어야 내가 다른 사람에게 했던 일도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다.


그러니 지금 실수한 나에게도 예전처럼 곧바로 화를 내지 않아도 된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어.”


먼저 토닥여주고, 충분히 마음을 가라앉힌 뒤에 천천히 돌아보는 것이다.


“그런데 다음에는 어떻게 해볼까?”


어쩌면 이것이 두고 온 나를 데리러 가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과거의 나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나를 더 이상 혼자 남겨두지 않는 것.


그리고 지금의 나 역시 실수할 때마다 다시 버려두지 않는 것.


그렇게 하나씩 나를 데리고 살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찾으러 갔던 그 아이가 이미 내 옆에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르겠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로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