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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에서 자유로워 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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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
작성일26-08-16 19:04 조회4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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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우리는 수많은 ‘하지 마라’를 배운다.


문지방을 밟지 마라.
밤에 손톱을 깎지 마라.
휘파람을 불면 귀신이 나온다.


어른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말이었을지 몰라도 어린아이에게는 그것이 세상의 법칙처럼 느껴진다. 

하지 않으면 안전하고, 하면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 마음이 생긴다.


그런데 금기는 단순히 행동 하나를 막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는 부모가 곁에 없어도 내가 나에게 ‘하지 마라’고 말하기 시작한다.


“이런 생각은 하지 말자.”
“이런 감정은 느끼지 말자.”
“이런 행동은 하면 안 돼.”


금기가 내면화되는 것이다.


상담을 공부하면서 나 역시 어린 시절 들었던 금기들을 하나씩 일부러 해본 적이 있다.


문지방을 밟아보기도 하고, 밤에 손톱을 깎아보기도 하고, 휘파람도 불어보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머리로 알고 있던 것과 몸으로 경험하는 것은 달랐다.


‘그건 미신이야’라고 이해하는 것보다, 내가 직접 해보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경험이 어린 시절의 두려움을 조금씩 풀어주었다.


그때 알게 되었다.


금기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금기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금기가 더 이상 나의 선택을 결정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무서운 장면을 못 보는 사람도 있다.


폭력적인 장면을 견디기 어려운 사람도 있고, 아주 슬픈 장면을 보면 감당하지 못하고 곧바로 즐거운 것을 찾는 사람도 있다.


그것을 단순히 겁이 많거나 감정이 약해서라고 볼 수는 없다.


어쩌면 그 감정을 충분히 경험하고 지나가 본 적이 적기 때문일 수도 있다.


두려움이 올라오면 피하고,
슬픔이 올라오면 즐거운 것으로 덮고,
불편함이 생기면 다른 생각으로 돌려버리는 것.


그 순간에는 편안해지지만, 피할수록 그 감정은 더 강한 힘을 갖게 된다.


특히 슬픔을 느끼지 않기 위해 늘 즐거움을 찾는 사람은 즐거운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슬픔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람일 수도 있다.


성적인 문제도 비슷한 면이 있다.


센터를 처음 열었을 때 성적인 문제를 가지고 오는 내담자를 많이 만났다. 

나는 그 이야기를 특별히 피하거나 지나치게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고, 일상의 다른 주제처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 이야기를 충분히 할 수 있게 되자 신기하게도 시간이 지나면서 성적인 내용은 점점 줄어들었다.


어느 순간에는 더 이상 그 주제가 상담의 중심이 아니었고,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금기시했던 것을 안전하게 말할 수 있게 되면서, 오히려 그것이 특별한 힘을 잃은 것이다.


그래서 자유는 어떤 것을 하지 않는 것과 다르다.


무서운 영화를 보지 않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무서운 영화를 볼 수도 있고 보지 않을 수도 있는 것.

슬픈 영화를 보는 것이 힘들다면 보지 않아도 되지만, 보고 싶을 때는 슬픔을 느끼면서 끝까지 볼 수 있는 것.

성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지만, 필요하다면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고 다시 일상의 다른 이야기로 돌아올 수 있는 것.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상태.


그것이 자유에 가까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반동’과 자유를 구분하는 일이다.


“하지 말라고 했으니 나는 할 거야.”


이것도 아직 금지에 반응하고 있는 상태다.


반대로 금기에 묶인 사람은 메모지에 ‘하지 말자’라는 자기만의 약속을 적어 여러 장 가지고 다니기도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반대로 ‘해보자’라는 말을 적어 가지고 다니기도 한다.


둘은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둘 다 자신을 움직이기 위해 만든 규칙일 수 있다.


‘하지 말자’가 많으면 금지에 묶이고,
‘해보자’가 많으면 또 다른 의무에 묶일 수 있다.


“나는 이제 이것도 해봐야 해.”
“두려워도 반드시 해내야 해.”
“나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야 해.”


이렇게 되면 ‘하지 마라’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다른 ‘해야 한다’를 만들게 된다.


그래서 가장 자유로운 문장은 어쩌면 이것일지도 모른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


하지만 이 말이 진짜 나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 감정을 마주보는 과정이 필요한 것 같다.


무서우면 무서운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부끄러우면 부끄러운 대로,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감정을 없애려고 하지 않고 그 감정이 지나갈 때까지 충분히 경험해 보는 것이다.


감정을 끝까지 마주본다는 것은 감정에 빠져 계속 되풀이한다는 뜻이 아니다.


감정을 피하지 않고 경험하여, 그 감정이 더 이상 나의 선택을 지배하지 못하게 되는 것​에 가깝다.


그때 비로소 선택할 수 있다.


무서운 영화를 봐도 되고, 안 봐도 된다.


슬픈 장면을 봐도 되고, 오늘은 보고 싶지 않으면 지나가도 된다.


누군가에게 다가가도 되고, 거리를 두어도 된다.


말해도 되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


그 선택이 두려움이나 금지 때문이 아니라 내가 편안하게 선택한 결과가 되는 것이다.


어쩌면 상담이 하는 일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그러지 마세요.”라고 또 다른 금기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피했던 마음을 안전하게 바라보고,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것을 말해보고,


그동안 두려워했던 감정을 충분히 느껴보고,


마침내 그 감정과 나 사이에 조금의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


그 공간이 생기면 사람은 비로소 선택할 수 있다.


금기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이 있어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하지 마라’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그 말을 다시 바라볼 수 있다.


정말 그런가?

내가 직접 해보면 어떤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질문을 하나씩 통과하면서, 오래된 금기는 조금씩 힘을 잃는다.


그리고 어느 날 알게 된다.


나는 이제 하지 않아도 괜찮고, 해도 괜찮다.


이제 선택은 금기가 아니라 내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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