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로 아픔을 견뎌온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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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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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며칠째 이어진 더위를 씻어내리듯 쏟아지는 비가 나는 좋았다.
공기가 달라지고, 몸에 붙어 있던 더위와 묵은 때까지 함께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비가 시원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출근길 라디오에서 통영과 거제 쪽에 물난리가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상담센터에 도착해서는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내담자들이 올 수 있을까?’
결국 예상대로 한 내담자가 늦고 있었다.
돌이켜보니 내가 느꼈던 이상한 불편감에는 여러 마음이 함께 들어 있었다.
나는 비가 좋았다. 시원했고, 마음까지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누군가에게는 같은 비가 불편과 두려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마음껏 좋아하다가도 한 번 멈칫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득 이 경험이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받은 사람들이
자신의 아픔을 충분히 느끼지 못하는 이유와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일수록 너무 빨리 이해하려고 한다.
‘엄마도 힘들었겠지.’
‘아빠도 어쩔 수 없었을 거야.’
‘그 사람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겠지.’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을 거야.’
상대의 사정을 이해하는 것은 분명 성숙한 능력이다.
하지만 때로는 그 이해가 너무 빨리 찾아온다.
내가 왜 아팠는지 충분히 들여다보기도 전에 상대를 이해하고,
내가 무엇을 원했는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상대의 입장을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나는 왜 아팠을까?’라는 질문보다
‘그 사람은 왜 그랬을까?’라는 질문이 더 익숙해진다.
어쩌면 이 사람들은 이해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기 전에,
이해함으로써 아픔을 견뎌온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상대에게 화를 내는 것이 두렵고, 가까운 사람을 원망하는 것이 불편하고,
관계가 깨질까 걱정될 때 사람은 상대의 사정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감정을 다독일 수 있다.
‘저 사람도 힘들었을 거야.’
그 말을 하면 마음이 조금 편해진다.
하지만 그 순간 사라지는 것은 상대에 대한 원망만이 아니다.
때로는 내가 실제로 아팠다는 사실까지 함께 희미해진다.
오늘 아침 나는 그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다.
비가 좋아서 충분히 좋아하고 싶었지만,
다른 곳에서 비로 힘든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마음이 잠시 멈췄다.
그렇다고 내가 비를 좋아하는 마음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이 비가 좋다.’
그리고 동시에
‘저곳에서는 많이 힘들겠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두 마음은 함께 존재할 수 있었다.
가까운 사람에게 받은 상처도 그럴 것이다.
‘나는 정말 아팠다.’
그 사실을 먼저 충분히 느껴도 된다.
그리고 그다음에
‘그 사람에게도 그런 사정이 있었겠구나.’
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해한다고 해서 아팠던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상대를 이해한다고 해서 내가 느꼈던 서운함이나 분노, 외로움까지 틀린 감정이 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내 아픔을 충분히 인정한 뒤에 하는 이해가 더 온전한 이해일 수 있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일수록 나의 감정보다 그 사람의 사정을 먼저 생각하도록 배워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부모를 이해하고, 배우자를 이해하고, 자녀를 이해하면서 정작 자신의 마음은 뒤로 미뤄놓는다.
하지만 이해는 감정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 이후에 올 수도 있다.
나는 오늘 아침, 비를 보며 잠시 멈칫했던 내 마음을 통해 그 사실을 조금 더 선명하게 알게 되었다.
좋은 것은 충분히 좋아해도 된다.
아픈 것은 충분히 아파해도 된다.
그리고 충분히 느낀 다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이 관계 안에서 나를 잃지 않으면서 타인을 이해하는 방법일 것이다.
이해하기 위해 내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은 이기적인 일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해로 자신의 아픔을 견뎌온 사람에게 필요한 또 하나의 이해인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상대를 이해하기 전에
내가 얼마나 아팠는지를 먼저 이해해주는 것.
그것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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