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살아보지 못한 나를 만나는 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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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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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특별한 취미가 없어서 무엇을 해볼까 생각하다 시작한 것이 이제 두 달쯤 되었다.
아직 기타를 잘 치는 것 같지는 않다. 소질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타를 잡고 있는 내가 싫지 않다.
아직 태가 나지는 않지만, 그 모습이 마음에 든다.
처음에는 아들이 사용하던 기타가 계기가 되었다.
아들이 타국으로 떠나면서 집에 두고 간 기타가 눈에 들어왔고, 그것을 보다가 악기를 배워볼까 싶었다.
그런데 가만히 돌아보니 이야기는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시작되어 있었다.
20대의 나는 기타를 배우고 싶어 기타를 한 대 샀다. 당시에는 기타가 5만 원 정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형편이 여의치 않아 결국 배우지 못했다.
어린 시절에는 그림을 잘 그린다는 말을 자주 들었고, 한때는 그림을 전공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가 그림을 하겠다고 하면 ‘화쟁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림은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때의 나는 좋아하는 것보다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을 선택하는 법을 배웠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는 무언가를 배울 때 유난히 효율을 따지는 편이다.
시간과 비용을 들일 만한지,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는지, 계속할 수 있는지 생각한다.
그런데 먹는 것처럼 비교적 가벼운 선택에서는 이런 계산이 덜하다.
유독 ‘배움’ 앞에서 이런 기준이 강하게 작동한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아차렸다.
어쩌면 어린 시절 들었던 “돈이 안 되는 일”이라는 말이 내 안에 하나의 기준으로 남아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좋아하는 것보다 쓸모 있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
배움은 결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
시간과 돈을 들였다면 무언가 남아야 한다는 것.
그런데 취미를 생각하다 보니 조금 다른 질문이 생겼다.
정말 쓸모없는 일을 해도 괜찮은 걸까.
영화도 그렇고 연극도 그렇다.
그것이 당장 경제적인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영화를 보고 연극을 본다. 음악을 듣고 그림을 감상한다.
꼭 쓸모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기꺼이 갖는다.
그런데 내가 직접 무언가를 배우려고 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걸 배워서 뭐 하지?’라는 질문이 따라온다.
어쩌면 취미란 바로 그 지점에서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취미는 잘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닐 수 있다.
돈을 벌기 위해서도, 전문성을 만들기 위해서도 아니다.
잘하지 못해도 되고, 결과가 없어도 되고, 중간에 그만두어도 된다.
그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내가 조금 즐거웠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기타는 내게 조금 특별하다.
20대에 기타를 사고도 배우지 못했던 나는,
훗날 아들에게 기타를 한번 배워보면 어떻겠느냐고 말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하지 못했던 것을 아들에게 은근슬쩍 건넨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아들은 나보다 훨씬 열심히 기타를 배웠고, 밴드 활동까지 했다.
그리고 지금은 생업을 위해 타국으로 떠났다.
아들이 두고 간 기타를 보면서 나는 아들의 흔적만 본 것이 아니었다.
그 기타를 통해 30여 년 전 기타를 사고도 배우지 못했던 젊은 시절의 나를 다시 만났다.
상담이 없는 시간, 나는 이전에는 책을 읽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글자가 잘 들어오지 않았다.
전문서적을 읽으며 무언가를 더 쌓는 시간이 예전만큼 편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어느 날 기타가 들어왔다.
책에서 기타로 옮겨간 것은 어쩌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동안 나는 배우는 것을 통해 나를 성장시키고, 전문성을 쌓고,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기타는 당장 아무것도 만들어주지 않는다.
잘하지 않아도 되고, 누군가에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저 손가락으로 줄을 누르고 소리를 내면 된다.
아직 태가 나지 않는다. 소질도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런데 기타를 잡고 있는 내가 싫지 않다. 오히려 마음에 든다.
이것이 어쩌면 지금 내게 필요한 경험인지도 모르겠다.
잘하지 않아도 되는 나.
성과를 내지 않아도 되는 나.
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무언가를 배워도 되는 나.
최근 상담에서 만나는 청소년들을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된다.
이들은 무언가를 만들거나 악기를 다루는 것을 좋아하고, 자기만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학교나 가정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공부와 같은 영역에서는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다고 느끼기도 한다.
아이들을 만나면서 나의 어린 시절과 겹쳐지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좋아했고, 그림을 잘 그린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당시 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쓸모 있는 능력’으로 인정받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에게 내가 못해본 것을 대신 살아보게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내가 그림을 좋아했다고 아이에게 그림을 권할 것도 아니고, 기타를 시작했다고 악기를 권할 것도 아니다.
다만 그 아이의 현재 모습을 그 사람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 잘하지 못한다고 해서 앞으로도 잘하지 못할 사람인 것은 아니다.
지금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당장 쓸모 있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삶에서 아무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니다.
상담자는 때때로 한 사람의 현재보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가능성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취미도 다시 보게 된다.
나는 그동안 배우는 일에도 자격을 요구했던 것 같다.
시간과 비용을 들일 가치가 있어야 하고, 어느 정도 결과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배워보고 싶다.
기타를 꼭 잘 치지 않아도 된다. 1년 뒤 한 곡 정도 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 한 곡을 완성하지 못해도 괜찮다.
그저 기타를 잡고 있는 내가 마음에 든다면 그것으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취미는 어쩌면 우리가 잊고 있던 자기 자신을 다시 만나는 작은 통로인지도 모른다.
그 만남은 때때로 슬프기도 하다. 문득 20대의 나를 생각하다 눈물이 났다.
그 꽃다운 나이에 내가 누리지 못했던 것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미 여러 번 애도했다고 생각했는데도 아직 남아 있는 눈물이 있었다.
그 눈물은 그때의 나를 다시 발견했기 때문에 나온 것 같다.
“그때 너도 하고 싶은 게 많았구나.”
“많이 아쉬웠겠다.”
“그래도 여기까지 잘 왔네.”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에게 그렇게 말해주는 것.
어쩌면 그것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살아보지 못한 나를 만나는 과정은 어느 순간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눈이 되기도 한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나를 만나는 일이, 다른 사람의 아직 살아보지 못한 가능성을 알아보는 눈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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