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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놓아둔 마음까지 데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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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
작성일26-08-09 21:54 조회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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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무렵, 아주 오래된 나를 만나는 듯한 경험을 했다.


숲길이 보였다. 낙엽 냄새가 났고, 길을 따라 들어가니 집 한 채가 나타났다. 

나무로 된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나무 바닥과 하늘색 계열의 벽지, 고가구가 있는 익숙한 집이 나왔다. 

창가 가까이에는 소파가 있었고, 그곳이 내가 주로 앉는 자리였다. 나는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모습이 묘했다. 스무 살 무렵의 젊은 남자 같았다. 

금발에 모자를 쓰고 있었고, 유럽의 어느 나라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혼자 있는 것을 아주 편안해했고, 2층 서재로 올라가 책을 읽고 있었다. 

아직 학문을 더 연마해야 하는 젊은이 같았다.


문득 영화 <삼총사>가 떠올랐다. 

친구들과의 의리와 모험, 그리고 위험을 감수하면서 누군가를 지키려는 사람. 

중요한 것을 포기해서라도 지켜야 할 사람이 있고, 시간이 흐른 뒤에는 ‘그때 잘했다’고 말할 것 같은 사람.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 젊은이는 어쩌면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의 나였을지도 모른다.


어릴 때 내 머리카락은 밝은 갈색이었다. 

동네 언니 두 명과 어울려 들과 산을 뛰어다니며 놀았고, 우리는 스스로를 ‘미녀 삼총사’라고 부르곤 했다. 

오늘 떠오른 삼총사는 어쩌면 그때의 기억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또 다른 삼총사를 떠올렸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나는 아이 둘을 데리고 여행을 참 많이 다녔다. 

남편은 국내 여행은 함께했지만 해외여행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외에는 아이 둘과 나, 셋이서 다니곤 했다. 돌이켜보니 그때도 우리는 작은 삼총사였다.


어쩌면 내 삶에는 오래전부터 ‘삼총사’가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의 나와 언니 둘.
아이들과 나.
그리고 오늘 만난 젊은이와 그의 친구들.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가장 중요한 삼총사는 따로 있었다.


어린 시절의 나, 20대의 나, 그리고 지금의 나.


20대의 나는 책을 읽고 싶었다. 

여행하고 싶었고, 나를 표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스물다섯에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삶의 중심은 빠르게 ‘나’에서 ‘엄마’로 이동했다. 

그 뒤로 오랫동안 나는 나라는 사람보다 엄마로 살아온 시간이 더 길었다.


그렇다고 내 삶이 부족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이들에게 책을 많이 사주었고,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도 많이 다녔다. 

40대에 가까운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젊을 때 해보지 못했던 콘서트, 여행, 물놀이, 나이트 같은 경험도 해보았다. 

그때 나름대로 모험을 해보았고, 그래서 젊은 시절에 못 해본 것에 대한 미련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알게 되었다.


부족하지 않았다고 해서 충분했던 것은 아니었구나.


내가 부족했던 것은 어쩌면 경험이 아니었다.


다른 결의 무언가였다.


나는 젊을 때 공부하고 싶었던 것 같다.


10대에는 도서관에 가서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었다. 

그때의 독서는 순전히 나의 호기심과 취향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20~30대에는 아이들을 잘 키우기 위한 책을 읽었다. 

30대에는 다시 대학공부를 시작했다. 

40대에는 석사를 하면서 관련 책들을 공부했고, 50대에 들어서는 박사를 하면서 점점 더 전문서적을 읽었다.


나는 공부를 놓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쩌면 내가 읽고 싶은 것을 읽는 공부는 충분히 하지 못했다.


내담자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심리학을 공부하고, 

상담을 더 잘하기 위해 전문서적을 읽고, 사람의 마음을 더 알고 싶어서 계속 질문했다. 

지금도 나는 내담자의 이야기를 더 잘 이해하고 싶어서 공부하고,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러니 나를 위한 공부라고만 할 수도 없다.


내 공부는 대부분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한 공부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와 겹치는 마음을 만나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 만난 20대의 젊은이는 달랐다.


그는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 책을 읽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냥 자기가 알고 싶어서 읽고 있었다.


혼자 있는 것이 편안했고, 자기 세계가 있었고, 학문을 더 연마하고 싶어 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문득 생각했다.


아, 내가 젊을 때 놓아둔 것은 공부 자체가 아니라 ‘내가 궁금해서 하는 공부’였을지도 모르겠구나.


올해 1~2월, 나는 깊은 심연으로 들어갔다가 나온 경험을 했다. 

그때는 아주 초기의 감각까지 내려갔던 것 같고, 그 이후 한동안 전문서적을 거의 읽지 않았다.


그때는 왜 그런지 몰랐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어쩌면 그것도 하나의 변화였을지 모르겠다.


공부를 그만둔 것이 아니라, 공부의 방향이 잠시 멈춘 것.


‘무엇을 더 알아야 하지?’가 아니라
‘나는 지금 무엇이 궁금하지?’를 묻는 자리로 이동하기 위해서.


그래서 앞으로는 심리학 책이 아닌 책도 읽어보고 싶다. 

상담에 도움이 되지 않아도 되고, 내담자를 이해하는 데 필요하지 않아도 되고, 글을 쓰기 위한 자료가 아니어도 되는 책.


그저 내가 읽고 싶은 책.


지금은 눈이 예전 같지 않아 돋보기가 없으면 책을 읽기도 어렵다. 

이상하게도 그 사실이 오늘의 젊은이를 더 선명하게 만든다.


젊을 때는 시간이 없어서 충분히 읽지 못했고, 

지금은 시간이 있는데 눈이 예전 같지 않다.


그래도 읽을 수 있다.


천천히 읽어도 되고, 큰 글씨로 읽어도 되고, 전자책이나 오디오북을 이용해도 된다.


중요한 것은 다시 독서의 주인을 나에게 돌려주는 것일 테니까.


어쩌면 내가 왜 자꾸 빨리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여성으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외모나 젊음 때문에 생기는 시선과 오해에 약간의 걸림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차라리 외모가 더 이상 해석의 대상이 되지 않는 나이가 되면 편하지 않을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 20대의 젊은이를 만나고 나니 굳이 빨리 늙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젊어도 자유로울 수 있고,
여성이어도 자유로울 수 있고,


누군가의 시선과 상관없이 나로 존재할 수 있다.


무엇보다 지금의 나는 자유롭다.


경제적인 문제를 누군가에게 크게 의지하고 있다면 눈치를 보거나 허락을 구해야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나는 삶의 많은 부분에서 놓여 있다. 

가고 싶으면 가고, 있고 싶으면 있고, 만나고 싶으면 만나고, 혼자 있고 싶으면 혼자 있다.


몸도 마음도 걸림없는 자유인.


그런 내가 이제야 20대의 젊은이를 만났다.


돌아갈 필요는 없다.


20대가 될 필요도 없다.


그저 그때 놓아두었던 마음을 지금의 삶으로 데리고 오면 된다.


어린 시절의 나는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법을 알고 있다.


20대의 나는 책을 읽고, 공부하고, 세상을 향해 나가고 싶어 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실제로 어디든 갈 수 있다.


그러니 이제 셋이 함께 가면 된다.


어린 나의 자유와,
20대의 호기심과,
지금의 나에게 주어진 자유를 가지고.


오늘 만난 젊은이는 마지막에 아이들에게 말했다.


“네 안의 목소리를 따라 살았으면 좋겠어.”


그 말을 이제는 나에게 들려주고 싶다.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자.


그때의 나는 충분히 살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잘못 산 것도 아니다. 

엄마로 살았고, 배우는 사람으로 살았고, 상담자로 살았고, 

아이들과 함께 여행하며 세상을 보았다. 그 모든 시간은 나의 삶이었다.


다만 그 삶 속에서 조금 뒤로 물러나 있던 내가 있었을 뿐이다.


이제 그 사람을 데리고 간다.


“너도 같이 살자.”


과거로 돌아가려는 것이 아니다.


그때 놓아두었던 마음까지 데리고
지금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나이가 들어 얻는 자유인지도 모른다.


젊을 때의 나를 버리고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젊을 때 놓아두었던 나까지 품고


지금의 나로 살아가는 것.


부족한 삶은 아니었다.


다만 충분히 나로 살지는 못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이제는 그 마음까지 데리고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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