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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감각으로 번역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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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
작성일26-08-11 11:27 조회3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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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말로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불안한 것은 분명한데 무엇이 불안한지 모르겠고, 

두려운 것은 알겠는데 그 두려움을 설명하려 하면 다시 “그냥 무서워요”라는 말로 돌아온다. 

수치심이나 막연한 불편감도 마찬가지다. 

감정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붙잡아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럴 때 감정을 다른 감각의 언어로 옮겨보기도 한다.


“그 감정이 어떤 모양이라면 어떨까요?”
“색깔이 있다면 무슨 색일까요?”
“소리가 난다면 어떤 소리일까요?”
“크기는 어느 정도인가요?”
“무게가 있다면 얼마나 무거울까요?”
“만져진다면 어떤 질감일까요?”


감정을 분석해서 이름을 붙이는 대신, 

잠시 감정을 바라볼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어보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마다 참 다른 모습이 나온다.


어떤 사람에게 불안은 검고 커다란 덩어리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뾰족한 가시다. 

무거운 돌처럼 느껴지는 사람도 있고, 몸을 휘감는 끈적한 무엇처럼 느끼는 사람도 있다.


같은 감정이라고 해서 같은 모양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 감정이 그 사람 안에서 어떻게 경험되고 있는지가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불안, 공포, 두려움, 수치심처럼 자신을 위축시키는 감정을 처음 다룰 때는 회색이나 검정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하나의 덩어리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표현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 감정을 충분히 바라보고, 감정의 덩어리를 자기 바깥에 꺼내어 놓은 뒤 

그 자리에 무엇이 있으면 좋겠는지를 물어보면 재미있는 변화가 나타난다.


처음에는 회색과 검정뿐이던 화면에 색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하늘이 나타나고, 나무가 나타나고, 꽃이 피고, 길이 생긴다. 

어떤 사람에게는 바다가 나타나고, 어떤 사람에게는 햇빛이 비치는 들판이 나타난다.


감정만 가득했던 공간에 풍경이 생기는 것이다.


나는 이 과정을 단순히 감정을 없애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정과 자신 사이에 조금의 거리를 만들어내는 과정에 가깝다고 느낀다.


처음에는 ‘내가 불안하다’와 ‘나는 불안하다’가 거의 같은 의미로 느껴진다. 

그러나 불안을 하나의 모양으로 바라보고, 색과 무게와 질감을 느껴보면서 조금씩 달라진다.


‘내가 불안하다’에서


‘내 안에 불안이 있다’로 옮겨가는 것이다.


아주 작은 차이 같지만 그 사이에는 중요한 공간이 생긴다.


그 공간이 생기면 다른 것도 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감정을 감각으로 옮겨보는 작업은 단순한 심상이나 표현 활동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정서적 경험을 감각의 형태로 펼쳐놓으면,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냄새까지 물어보면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먼지 냄새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쓰레기 냄새라고 한다. 

썩은 음식물 냄새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냄새는 다른 감각보다 설명하기 어려운 것 같지만, 

이상하게도 사람의 기억과 경험을 깊이 건드리는 감각이기도 하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면서 맛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커피 향이 좋아서 마신다”고 말한다.


와인을 마실 때도 잔을 입에 대기 전에 먼저 향을 맡는다. 

냄새를 통해 이미 그 대상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도 그럴까.


오래전 한 내담자는 악마는 비릿한 냄새를 맡고 천사는 꽃향기를 맡는다고 이야기했다. 

그 말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냄새에도 한 사람이 살아오면서 만들어온 기억과 상징이 함께 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오래된 후각의 기억이 하나 있다.


십여 년 전, 내가 나 자신에게 집중하던 어느 시기에 

새벽에 정원을 거닐 때 맡을 법한 좋은 냄새를 경험한 적이 있다.


어떤 꽃의 향이라고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특정한 꽃 하나의 냄새라기보다 새벽의 정원이라는 공간 전체에서 느껴지는 냄새에 가까웠다. 

그래서 당시에도 그것을 ‘새벽에 정원을 거닐 때 맡을 법한 냄새’라고 표현했던 것 같다.


그때는 그 경험을 특별히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우연히 일본 드라마에서 후각환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자 오래전의 그 경험과 상담에서 만났던 여러 사람의 냄새 이야기가 한꺼번에 떠올랐다.


돌이켜보니 내가 상담에서 해온 작업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었다.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말로만 표현하지 않는다.


때로는 모양으로 표현하고, 색으로 표현하고, 소리로 표현한다. 무게가 되기도 하고 질감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는 냄새가 되기도 한다.


감정을 감각으로 번역해 보면 사람마다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같은 불안이라도 누군가에게는 검은 돌이고, 

누군가에게는 뾰족한 가시이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썩은 음식물 냄새일 수 있다.


그 차이를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그 사람이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의 내면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상담자는 그 감각에 정답을 붙여주는 사람이 아니라, 

내담자가 자신의 경험을 조금 더 가까이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 사람에 가깝다.


“왜 그런 모양인가요?”라고 서둘러 해석하기보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떤 느낌이 드나요?”
“그 감정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그것이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있으면 좋겠나요?”


하고 따라가다 보면, 때로는 감정에 가려져 있던 다른 세계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때 처음에는 회색과 검정뿐이던 화면에 다시 색이 들어온다.


감정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감정만 보이던 자리에서 이제 다른 것들도 함께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상담은 보이지 않는 마음을 억지로 설명하게 하는 일이 아니라, 

마음이 스스로 사용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아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말이 되지 않을 때는 모양으로,


모양으로 표현하기 어려울 때는 색으로,


색으로도 부족할 때는 소리와 무게와 질감으로,


그리고 때로는 냄새로.


그렇게 감정을 감각의 언어로 하나씩 번역해 가다 보면, 

처음에는 하나의 덩어리였던 마음이 조금씩 펼쳐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자리에는 더 이상 감정 하나만 남아 있지 않다.


하늘이 있고, 나무가 있고, 길이 있고, 빛이 있다.


마음이 다시 하나의 풍경을 갖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감정을 감각으로 번역하는 일은,

보이지 않던 마음을 보이게 하는 일이 아니라


마음이 이미 가지고 있던 모습을
스스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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