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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편과 남의 편을 가르는 험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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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
작성일26-08-11 21:05 조회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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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험담을 늘어놓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화가 나서일 수도 있고, 억울함을 털어놓기 위해서일 수도 있으며, 자신이 받은 상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때로는 공통의 적을 만들어 서로가 같은 편이라는 것을 확인하려는 마음도 있다.


“너도 그 사람 싫지?”


이 한마디에는 묘한 친밀감이 들어 있다.


같은 사람을 비난하는 순간,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가 되고 상대방은 ‘남’이 된다.


그래서 험담은 단순히 누군가를 싫어해서 하는 말만은 아니다.


때로는 우리 편과 남의 편을 가르는 방식으로 관계의 안전을 확인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린 시절부터 험담이 많은 가족 안에서 자란 사람에게는 이 구조가 조금 다르게 경험될 수 있다.


가족 안에서 누군가에 대한 평가와 비판이 끊임없이 오가고, 특히 주양육자가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높은 기준으로 평가받았다면 

아이는 자연스럽게 그 평가의 세계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


“저렇게 보이면 안 돼.”
“저렇게 하면 안 되는 거야.”
“왜 저것밖에 못 하지?”


이런 말들을 반복해서 듣다 보면 아이는 어느 순간부터 타인을 평가하는 기준뿐 아니라 

자신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그리고 그 기준에 자신이 미치지 못한다고 느끼면 자아상 역시 그에 맞춰 만들어진다.


‘나는 부족한 사람일지도 몰라.’
‘나는 잘해야 인정받을 수 있어.’
‘누군가가 나를 평가하고 있을 거야.’


특히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주양육자의 평가 대상이 되어 왔다면, 

타인의 말 한마디가 단순한 현재의 말로 들리지 않을 수 있다.


현재의 사람이 과거의 사람과 닮아 있을 때 더욱 그렇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만난 상사가 

다른 사람을 평가하거나 험담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하자.


그 상사가 자신에 대해 직접적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떠오를 수 있다.


‘혹시 나도 저 사람에게 저렇게 이야기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재의 상황만 놓고 보면 아직 확인되지 않은 생각이다.


그런데 마음에서는 이미 낯익은 장면이 시작된다.


주양육자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던 모습,
그 안에서 자신 역시 평가받던 기억,
어머니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느꼈던 어린 시절의 자신.


그때의 감각과 현재의 상황이 겹쳐지면서 기시감이 생긴다.


‘이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사실 본 것은 현재의 상사가 아니라,

과거에 자신을 평가하던 관계의 풍경일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사람에게 험담은 단순한 대화가 아니다.


험담은 곧 관계의 신호가 된다.


‘저 사람이 누구를 험담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저 사람은 나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로 마음이 빠르게 이동한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상대방의 평가를 예측하기 시작한다.


‘나는 저 사람에게 부족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까?’
‘혹시 뒤에서는 나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또 누군가의 평가 대상이 된 것은 아닐까?’


이때 현재의 상사가 과거 주양육자와 동일한 사람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보여주는 특정한 특징이 과거의 관계 경험을 건드리는 것이다.


상사의 험담은 현재의 사건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에는 과거의 기억이 함께 들어온다.


그래서 상담에서는 “상사가 정말 당신을 험담했는가?”만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 때가 있다.


오히려 중요한 질문은 이것일 수 있다.


“상사가 그런 모습을 보였을 때, 당신에게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리고 또 하나.


“그때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된 것 같았을까?”


이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현재의 직장 이야기가 어느 순간 어린 시절의 자기 이미지와 연결되기도 한다.


‘나는 또 평가받는 사람이 되었구나.’


그 마음을 발견하는 순간, 지금의 상사와 과거 주양육자가 조금씩 분리되기 시작한다.


상사가 다른 사람을 험담하는 것은 상사의 행동이다.


그것이 곧 나를 험담한다는 증거는 아니다.


그리고 설령 누군가가 나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내가 그 사람이 평가한 모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험담하는 사람의 입을 막는 것이 아니라,


그 험담을 들었을 때마다 자동으로 ‘나는 평가받는 사람’의 자리로 돌아가는 나를 알아차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에는 주양육자의 평가가 곧 세상의 평가처럼 느껴진다.


주양육자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곧 내가 어떤 사람인지 결정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알게 된다.


누군가의 평가와 나의 존재는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군가가 사람을 나누고, 평가하고, 험담한다고 해서


나 역시 그 사람이 만들어 놓은 ‘우리 편’과 ‘남의 편’ 사이에서 나의 자리를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누군가를 험담해야만 우리 편이 되는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


그리고 누군가의 험담을 듣는 순간


‘혹시 나도 저 사람에게 평가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움츠러들지 않아도 된다.


그 순간 필요한 것은 상대방의 마음을 추측하는 일이 아니라
내 마음을 바라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이 사람의 험담인가,
아니면 다시 누군가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인가.’


그 질문 앞에 서면 험담은 더 이상 단순한 뒷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오래전부터 나를 따라온 ‘평가받는 나’와 헤어질 수 있는 순간​이 된다.


우리 편과 남의 편을 가르는 험담 속에서
나는 더 이상 어느 편에 서야 안전한지를 묻지 않고,
내가 누구인지 묻는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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