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주체성을 붙잡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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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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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내가 나를 지킬 수 있다고 믿었던 감각이 한순간에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보다 더 깊은 곳에서 무너지는 것은 어쩌면
“나는 이런 일을 당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자기감각인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 한 철학관에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부모형제의 복은 없는데, 가진 복은 많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아마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환경으로부터 받는 복이 별로 없나 보다.
부모도, 형제도, 어쩌면 앞으로 살아가면서 만날 사람들도 나를 충분히 보호해주지는 못하겠구나.
그러니 이런 말을 위로 삼아 하는가 보다.
그런데 이어서 들었던 말은 조금 달랐다.
“어떤 신이 당신을 보호하고 있어서, 당신이 허락하지 않으면 누군가가 함부로 하지 못한다.”
그 말을 나는 묘하게 받아들였다.
사실 여부를 따지기보다, 그 말이 내게 하나의 믿음을 만들어주었던 것 같다.
나는 보호받고 있다.
그러니 세상을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돌이켜보면 그 믿음 덕분에 나는 꽤 자유롭게 살았던 것 같다.
모든 사람을 경계하지 않았고, 세상이 언제든 나를 공격할 수 있다는 생각에 움츠러들지도 않았다.
그런데 몇 년 전, 그 믿음이 흔들리는 일이 있었다.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누군가에게 궁지에 몰렸고,
그 경험은 단순히 상처를 받은 것 이상의 충격을 남겼다.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누구도 나를 함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했던 것은 그 이후의 나였다.
상담을 받는 과정에서 나는 나를 궁지에 몰았던 그 사람의 이름을 오히려 보호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 순간 기가 찼다.
“나는 왜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까지 보호하고 있지?”
한동안 그 질문을 놓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런 생각에 닿았다.
어쩌면 나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해주었으면 하는 행동을 내가 그 사람에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내 사정을 한 번쯤 생각해주었으면 좋겠고,
내가 잘못한 것이 있더라도 나를 완전히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는 않았으면 좋겠고,
내가 궁지에 몰렸을 때 누군가가 나를 보호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
그것을 상대에게 요구하기보다 내가 먼저 상대에게 베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오랫동안 보호받는 사람보다는 보호하는 사람의 자리에 더 익숙했던 것 같다.
물론 실제로 아무런 보호도 받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살아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 분명 나를 지켜준 사람도, 관계도, 운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나온 시간을 가만히 돌아보면 부모에게서도, 형제에게서도,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충분히 보호받았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참 환경으로부터 박복했던 것 같다.
그런데도 꿋꿋하게 살아냈다.
언젠가 들었던 말이 있다.
“살아남은 사람은 모두 강하다.”
처음부터 강한 사람이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강하지 않은 위치에 놓였기 때문에 살아남는 과정에서 강해진다는 뜻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사람은 자신이 놓인 환경에 따라 담금질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약한 위치에 있다면 더 많이 살피고, 더 빨리 판단하고, 더 단단해져야 한다.
그렇게 살아남는 과정에서 처음의 나와는 다른 힘이 생긴다.
융의 연금술적 상징을 떠올리면 그것은 흑화에서 백화와 황화를 거쳐 적화로 가는 과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둡고 혼란스러운 경험을 통과하면서 내 안의 그림자를 만나고,
그것을 조금씩 의식하고, 결국에는 삶의 힘으로 통합해가는 과정.
그렇다면 내가 겪었던 어려움은 단지 나를 약하게 만든 경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안에서 나는 살아남는 법을 배웠고, 사람을 이해하는 법을 배웠고,
나와 타인의 감정을 구별하는 법을 배웠고, 내가 누구의 감정으로 행동하고 있는지를 묻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알게 된다.
상대를 보호하는 것이 언제나 나를 보호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때로는 상대를 보호하면서 내가 나를 지키고 있었고,
때로는 상대에게 베푸는 이해와 배려를 통해 내가 받고 싶었던 것을 대신 충족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근 아주 선명한 꿈을 하나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사람들을 돕고 있었고, 누군가가 내 행동에 반론을 제기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전혀 흥분하지 않았다.
그 사람에게 차분하게 이름을 물었고, 이름을 들은 뒤 바닥에 그 이름을 썼다.
꿈의 내용은 흐려졌지만 그 장면은 남아 있었다.
생각해보면 몇 년 전의 나는 나를 궁지에 몰았던 사람의 이름조차 보호하고 있었다.
그런데 꿈속의 나는 이제 상대의 이름을 보호하지도, 공격하지도 않았다.
그저 물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그리고 그 이름을 내 앞에 놓았다.
어쩌면 이것이 무너진 주체성을 다시 붙잡는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상대를 악인으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나를 지킬 수 있는 것.
상대를 이해하면서도 나를 포기하지 않는 것.
보호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보호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나를 허락하는 것.
강해진다는 것은 더 이상 아무에게도 상처받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상처받을 수 있는 나를 인정하면서도 다시 나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나는 환경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환경 속에서 살아남으며 나도 모르게 나를 단련해왔다.
돌이켜보면 참 꿋꿋하게 살아왔다.
이제는 그 강함으로 더 오래 버티는 것보다,
그동안 그렇게 열심히 나를 지켜온 나에게도 한 번쯤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이제는 너도 보호받아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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