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안의 기준을 만들어가는 사람
페이지 정보
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관련링크
본문
최근 스웨덴·영국 합작 드라마 〈영 월랜더(Young Wallander)〉를 보다가 오래전의 슬픔이 다시 올라왔다.
젊은 경찰관 발란더가 한 사건에 깊이 관여하면서 경찰 내부의 작은 규칙을 어기게 된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상급자는 그를 단순히 질책하기보다 규칙의 본래 의미를 이야기한다.
법과 규칙은 경찰을 옭아매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경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그 장면이 이상하리만큼 오래 마음에 남았다.
법을 수호하는 사람도 그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
규칙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해서 규칙의 보호 밖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렇다면 상담자를 보호하는 규칙도 상담자를 보호해야 하고,
내담자를 보호하는 규칙도 내담자를 보호해야 한다.
상담자라고 해서 보호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며,
수련생이라고 해서 내담자로서의 위치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나는 한때 교육분석을 받기 위해 상담실에 갔다.
표면적으로는 수련생이었지만, 그 자리에서는 분명 내담자였다.
그런데 당시에는 내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그리고 그 규칙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가 모호했다.
수련생으로서 조직의 규칙을 따라야 하는 사람인가.
교육분석을 받는 내담자로서 보호받아야 하는 사람인가.
그 경계가 명확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을 연구하고 다룬다는 사람들이 정작 자기 안에서 일어난 것과
다른 사람이 던진 투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그것을 더 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다시 떠넘길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사회적 직위를 가진 누군가의 격앙된 행동을 조직이 두려워한다면,
그 두려움을 감당하기 어려운 조직이 상대적으로 약한 사람을 희생시켜 자신을 보호해도 되는가.
강한 사람의 분노를 두려워해서 약한 사람에게 그 비용을 떠넘겨도 되는가.
조직은 그것을 조직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자신의 잘못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두려움을 대신 짊어지는 일이 될 수 있다.
당시 나는 혼란스러웠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보다,
왜 이 규칙이 이렇게까지 작동하는지가 이해되지 않았다.
아주 작은 규칙을 어긴 일에 비해 너무나 가혹한 일을 겪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외부의 규칙을 그대로 믿을 수 없게 되었다.
그 후 내 안에 하나의 기준이 생겼다.
나는 나를 믿는다.
이 말은 내가 언제나 옳다는 뜻이 아니다.
내 직감이 언제나 사실이라는 뜻도 아니다.
느낀 것과 확인된 사실은 구분해야 한다.
확인할 수 없는 것을 사실이라고 단정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내가 느낀 것을 없었던 일로 만들지도 않겠다는 뜻이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다면 멈춰서 살펴본다.
내 감정인지, 상대의 감정인지 구분한다.
내가 다른 사람의 투사를 받아들인 것은 아닌지 살핀다.
그리고 권위가 내 판단을 대신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러면서 나는 규칙을 바라보는 방법도 달라졌다.
젊은 시절 강의를 하면서 가끔 들려주던 이야기가 있다.
어떤 아내가 소시지를 구울 때마다 양 끝의 둥근 부분을 잘라서 버렸다.
남편이 왜 그러느냐고 묻자 아내는 말했다.
“우리 엄마가 그렇게 했어요.”
남편은 장모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장모 역시 대답했다.
“우리 엄마가 그렇게 했지.”
결국 할머니에게까지 가서 이유를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그때 우리 집 프라이팬이 작아서 소시지가 들어가려면 끝을 잘라야 했단다.”
처음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던 행동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유는 사라지고 행동만 남았다.
그리고 행동은 관습이 되고, 관습은 어느새 규칙처럼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규칙 앞에서 묻는다.
이 규칙은 누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인가?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인가.
조직을 보호하기 위한 것인가.
약한 사람의 경계를 지켜주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강한 사람의 자리와 권위를 지켜주기 위한 것인가.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묻는다.
지금도 이 규칙이 만들어졌던 본래의 목적을 수행하고 있는가?
시대가 바뀌고 사람이 바뀌었다면 규칙도 달라질 수 있어야 한다.
프라이팬이 바뀌었는데도 소시지의 끝을 자르고 있다면,
이제 그것은 음식을 위한 행동이 아니라 관습을 반복하기 위한 행동이 된다.
조직의 규칙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을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이유는 사라지고 “원래 그렇게 하는 것”만 남을 수 있다.
더 나아가 조직의 권위나 특정한 사람의 지위를 보호하는 수단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그때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규칙이 존재하는가,
아니면 규칙을 지키기 위해 사람이 존재하는가.
나는 이제 규칙 자체를 믿지 않는다.
그렇다고 규칙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규칙의 목적을 먼저 살핀다.
사람을 보호하는 규칙이라면 사람을 살리는 방향으로 작동해야 한다.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규칙 때문에 사람이 희생되고 있다면,
우리는 규칙 자체를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법을 수호하는 사람도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내담자를 보호하는 상담자도 어느 순간에는 내담자가 될 수 있다.
수련생이라는 이유로 내담자의 위치가 지워져서는 안 되고,
전문가라는 이유로 보호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이 사라져서도 안 된다.
그리고 사회적 직위를 가진 사람의 분노나 격앙된 행동을 조직이 두려워한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이 그 두려움의 비용을 대신 지불해서도 안 된다.
강한 사람의 두려움을 이유로 약한 사람이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내가 그 일을 겪은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사람을 볼 때 직함보다 사람을 먼저 본다.
사람의 마음을 연구한다는 것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함부로 규정할 수 있는 권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전문성은 권위가 아니라 책임이어야 한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계속 묻는다.
지금 내가 지키려고 하는 것은 사람인가, 아니면 나의 체면과 자리인가.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단지 상처를 입은 것이 아니었다.
내가 무엇을 믿고 살아갈 것인지 다시 정해야 했다.
원래라면 공동체가 함께 만들어주었어야 할 윤리적 기준을,
나는 상처를 겪은 뒤 내 안에서 다시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지금도 조금 씁쓸하다.
단단해진 것이 자랑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 단단함이 필요해지기까지 치러야 했던 대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자기 안의 기준을 만든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규칙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규칙 앞에서 “왜?”라고 물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는 규칙을 따른다.
그러나 규칙보다 먼저 묻는다.
이 규칙은 누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인가?
그리고 그 질문의 답이 사람이라면, 그 규칙은 사람을 지키는 방향으로 다시 작동해야 한다.
어쩌면 성숙한다는 것은 세상의 규칙을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언제 그 규칙을 지켜야 하고 언제 그 규칙을 다시 질문해야 하는지를 분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나를 믿는다.
그리고 이제는 그 믿음으로 세상의 규칙을 바라본다.
규칙이 나를 지켜주는지 묻고, 사람을 지켜주는지 묻고,
그 규칙의 이름으로 누군가가 희생되고 있지는 않은지 묻는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남이 정해준 기준이 아니라 내 안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