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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너머를 기억하는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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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
작성일26-08-14 16:44 조회3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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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새로운 곳의 프로필에 프로그램 하나를 추가해야 했다.


프로그램의 이름과 간단한 내용을 적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프로그램’이라는 말만 들어도 몸이 먼저 거북해졌다. 

자꾸 미루게 됐다. 현실적으로는 금방 정리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처음에는 5년 전의 한 사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프로그램과 관련된 일이었고, 

그때 나는 모욕감과 부당함, 배신감, 무력감과 억울함, 수치심을 경험했다. 

무엇보다 내가 나를 지키지 못했다는 느낌이 오래 남았다.


5년이 지났는데도 프로그램이라는 단어만으로 몸이 거부하는 것을 보며, 

그 사건이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나 싶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조금 다른 것이 보였다.


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을 생각하는 순간, 어느새 그 일의 끝까지 가 있었다.


프로그램의 이름을 적는 것에서 시작해 대상과 목적을 정하고, 내용을 구성하고, 

회기를 정리하고, 완성도 있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로필에 프로그램 하나를 소개하는 정도의 일이 어느새 ‘제대로 된 프로그램을 완성해야 하는 과업’으로 커져 있었다.


그때 문득 생각했다.


‘프로그램 이름만 적어 놓고 닫아도 되는 것 아닌가?’


이렇게 단순한 방법을 왜 처음에는 생각하지 못했을까.


아마 내 안에 이런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시작하면 웬만하면 끝을 내야 한다.
시작했으면 제대로 해야 한다.
요구받은 것은 빠짐없이 해내야 한다.


그런데 이 생각은 프로그램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오래전 BGT를 처음 받았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검사자가 보여주는 그림을 A4 용지 가운데 3분의 1 정도 크기로 그리고, 

다음 그림을 그릴 공간을 생각하며 아래로 차례차례 내려갔다. 

그런데 몇 장의 그림이 남았을 무렵 종이가 부족해져 속으로 난감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이라면 알고 있다. 

그림을 가로로 그려도 되고, 빈 공간을 활용해 위쪽에 그려도 된다. 

실제로 내담자들의 BGT를 보다 보면 가운데 하나를 그리고 양옆으로 옮겨가기도 하고, 

위쪽에 그리다가 비좁으면 다른 공간으로 옮겨가기도 한다. 

공간을 사용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정말 다양하다.


그런데 당시의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원래 정리정돈을 잘하는 사람이어서라기보다, 

‘검사를 받고 있다’는 상황에서 경직되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검사라는 생각이 들어오면 ‘제대로 해야 한다’는 마음이 강해지고, 

처음 정한 방식을 유지하는 것이 안전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주 어렸을 때 시험을 치르면서 시험지를 읽고 있는데 

교사가 옆을 지나가면 갑자기 긴장이 되어 글의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던 기억이다.


아마 초등학교 1, 2학년 무렵, 칠판에 나가 교사가 내준 문제를 풀지 못했다는 이유로 

머리를 칠판에 박혔던 경험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그때의 어린아이가 교사의 마음이나 어른들의 세계를 정확히 이해했을 리는 없다. 

하지만 몸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교사가 나를 보고 있다.
틀리면 망신 당한다.
그러니 제대로 해야 한다.
평가받는 순간에는 긴장해야 한다.


그렇게 아주 오래전부터 형성된 불안이 여러 경험을 거치며 반복되었고, 

5년 전의 사건에서 다시 강하게 건드려졌던 것은 아닐까.


그러고 보니 내가 두려워했던 것은 ‘프로그램’ 자체가 아니었다.


프로그램이라는 단어가 내 안에서 평가받는 상황, 제대로 해야 하는 상황, 틀리면 안 되는 상황​을 불러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머리로는 5년 전의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몸은 그보다 훨씬 오래된 것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몸은 사건의 날짜만 기억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그 사건을 통해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나를 지키려고 했는지,
어떤 방식으로 살아남았는지를 기억한다.


그래서 사건이 끝난 지 오래되어도 비슷한 자극이 오면 몸은 다시 반응한다.


‘프로그램’이라는 말 하나에도 거북해지고, 과업의 끝을 미리 생각하며 부담을 느끼고, 

다른 선택지가 있는데도 처음 정한 방식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얼마 전 ADHD가 의심되어 상담을 온 아이를 만났다.


아이의 눈을 보는데 이상하게 어린 시절의 내가 겹쳐 보였다.

그 흔들리는 눈빛의 이유를 알 거 같았다.


아이 주변에는 조부모와 외조부모, 삼촌과 이모, 외삼촌과 이모부,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까지 많은 어른들이 있었다. 

아이는 어른들의 세계를 다 알지는 못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아이가 나름대로 많은 것을 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어른들의 표정과 분위기, 관계의 움직임을 아이는 아이의 방식으로 읽고 있을 것이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너는 어른들의 세계를 잘 모른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많이 보고 있구나.’


그리고 그 말을 건네고 싶은 마음과 함께, 어린 시절의 나도 떠올랐다.


나 역시 어른들의 세계를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 세계의 긴장과 시선을 몸으로 읽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어린 시절의 나는 단지 불안했던 아이가 아니었다.


무서웠지만 주변을 아주 세심하게 살피고 있었고, 

무엇이 위험한지 알아차리기 위해 끊임없이 보고 있었던 아이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이런 질문이 생긴다.


어린 시절 형성된 불안을 나는 어떻게 그 오랜 시간을 버티며 견뎌왔을까.


돌이켜보면 불안이 사라진 채 살아온 것은 아니었다. 

불안을 가지고 살아가는 방법을 만들어온 것에 가까웠다.


제대로 하려고 했고, 책임을 다하려고 했고, 시작한 일은 끝내려고 했다. 

평가받는 자리에서는 더 조심했고, 사람들의 마음과 분위기를 세심하게 살폈다.


그것들은 때로 나를 힘들게 했지만, 

동시에 오랫동안 나를 지켜준 방식이기도 했다.


그러니 이제 와서 그 모든 것을 ‘융통성 부족’이라고만 이름 붙이고 싶지는 않다.


그때의 나에게는 그것이 나를 지키는 방법이었을 테니까.


다만 이제는 조금 다른 방법을 선택할 수도 있다.


시작했다고 반드시 그 자리에서 끝까지 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처음 정한 방식이 맞지 않으면 바꿔도 된다.


요구받은 것보다 더 많이 하지 않아도 된다.


평가받는 상황이 아니라면, 평가받는 사람처럼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프로필에 프로그램을 하나 추가하는 일이라면 프로그램 이름만 적어놓고 닫아도 된다.


그것도 하나의 ‘끝’이다.


어쩌면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것은 불안을 완전히 없애는 일이 아니라, 

불안이 나를 지키기 위해 사용했던 오래된 방식을 조금씩 내려놓아도 안전하다는 경험인지도 모른다.


몸은 여전히 오래전의 일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 기억을 가진 채 살아가는 내가 달라졌다.


그래서 몸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때는 그렇게 해야 했어.
하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도 괜찮아.
이번에는 내가 선택할게.


사건 너머에는 아직도 많은 것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나는 사건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 속에서 살아남아 온 나를 만난다.


사건 너머를 기억하는 몸.


어쩌면 그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는 일이, 

오래전의 나를 조금 더 다정하게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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