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위치 결정권의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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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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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때로 우리가 원하는 것은 특별한 대우나 높은 평가가 아니다.
그저 내가 해온 것을 함부로 낮추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일 때가 있다.
"나를 더 높게 봐주세요."
가 아니라,
"내가 애써온 것을 있는 그대로 봐주세요."
라는 바람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오랫동안 타인이 정한 기준 속에서 나의 위치를 확인하며 살아왔다.
어린 시절 우수상을 받아왔을 때, 아이였던 나는 아마 엄마가 기뻐해 주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축하보다 더 높은 기준이었다.
"너는 이 정도로 만족할 아이가 아니다."
그 말은 더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린 나에게 남은 것은 다른 감정이었다.
"내가 받은 것은 충분히 기뻐할 일이 아닌가 보다."
내가 이룬 것을 온전히 기뻐하기보다,
더 인정받을 수 있는 자리를 향해 계속 나아가야 한다는 마음이 자리 잡았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어린 시절의 나에게 이미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힘이 있었다는 점이다.
중학교 때 한 친구가 자신의 눈이 예쁘다고 말했다.
나는 그 친구의 눈도 예쁘지만 내 눈이 더 예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친구는 거울에 함께 비춰보자고 했다.
그때 친구는 양쪽 눈에 모두 쌍꺼풀이 있었고, 나는 왼쪽 눈에만 쌍꺼풀이 있었다.
눈에 보이는 기준으로 비교하면 친구가 더 유리했다.
그 순간 나는 졌다고 느꼈다.
그런데 스쿨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차창에 비친 내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 가지를 발견했다.
내 눈동자가 훨씬 맑다는 것.
친구의 눈은 쌍꺼풀이라는 외형적 기준에서는 앞섰지만,
내 눈에는 나만 가진 맑음이 있었다.
어린아이들은 때로 우리가 잃어버린 시선을 가지고 있다.
조카는 어린 시절 TV 속 아름다운 연예인이 나오는 광고를 보며 "우리 엄마가 더 예쁜데"라고 말했다.
객관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보면 다른 답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아이에게 엄마의 아름다움은 비교의 결과가 아니라 사랑과 연결된 존재의 가치였다.
어쩌면 나 역시 중학교 시절 차창에 비친 내 눈을 바라보며 발견했던 것은 이런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쌍꺼풀이라는 외부 기준이 아니라, 내 눈이 가진 맑음이라는 나만의 가치였다.
그때 알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사람을 비교하는 기준은 하나가 아니며,
내가 가진 가치는 누군가가 정한 하나의 기준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돌이켜보면 그 어린 아이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비교에서 이기는 것과 자신의 가치를 아는 것은 다른 일이라는 것을.
직장에서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나는 내가 맡은 일을 성실히 해왔고, 업무량도 많았으며, 성과로도 드러났다.
주변 사람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를 평가하는 기준은 달랐다.
내가 실제로 무엇을 해왔는지보다 다른 기준, 다른 상징을 통해 비교되었다.
그때 힘들었던 것은 단순히 낮은 평가를 받은 것이 아니었다.
"내가 쌓아온 시간과 노력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구나."
라는 허탈함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바라본다.
부모는 부모의 기준으로 자녀를 보고, 상사는 상사의 기준으로 구성원을 보고,
조직은 조직의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한다.
문제는 그들의 기준이 나의 가치가 되어버릴 때 생긴다.
나는 오랜 시간 여러 경험을 지나며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타인의 한계와 기준은 내가 통제할 수 없다.
내가 아무리 성실하게 살아도 누군가는 자신의 기준 안에서 나를 판단할 것이다.
내가 아무리 좋은 결과를 만들어도 누군가는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으로 나를 평가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세계의 범위일 뿐이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포기가 아니다.
오히려 자기 위치 결정권의 회복에 가깝다.
더 이상 누군가의 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해 나를 끊임없이 증명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더 이상 내가 가진 가치를 타인의 평가표에 맡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오랫동안 원했던 것은 높은 자리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함부로 낮춰지지 않고 싶었던 것이다.
가족 안에서도, 조직 안에서도, 관계 안에서도 나는 종종 누군가가 정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부모가 정한 자녀의 위치,
가족 안에서의 역할,
조직 안에서의 직급과 부서의 위치,
사회가 부여한 기준에 따른 위치.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위치가 나 자신을 설명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내가 어디에 위치해 있었는지가 나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내가 누구인지를 결정하지 않는다.
나의 가치는 내가 살아온 시간, 내가 해온 노력, 내가 만들어온 의미 속에 있다.
미성년일 때는 부모가 정한 세계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이후에는 배우자와 부모라는 역할 속에서 다시 나 자신을 뒤로 미루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자녀들이 자신의 삶으로 나아가고, 나에게도 나 자신의 모양을 돌아볼 시간이 생겼다.
늦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라도 깨닫게 된 것은 중요한 변화다.
나는 더 이상 타인이 정한 위치에서 나를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의 한계로 나를 규정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위치를 결정하는 권한을 다시 나에게 돌려줄 것이다.
자기 위치 결정권의 회복이란 세상의 평가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시선과 기준을 인정하면서도,
최종적으로 나의 가치를 판단하는 권한은 나에게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어쩌면 그 힘은 지금 새롭게 생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중학교 시절 차창에 비친 자신의 눈을 오래 바라보던 아이처럼, 이미 내 안에는 나만의 가치를 발견하는 힘이 있었다.
다만 오랜 시간 타인의 기준이 그 목소리를 덮고 있었을 뿐이다.
이제는 그 목소리를 다시 듣는 시간이다.
그리고 그 순간, 사람은 비로소 자신의 자리에서 살아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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