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에 인등을 밝힌다는 것-나를 지키면서 타인에게 닿는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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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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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깨달음이 있다고 해서 삶이 곧바로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순간에는 분명히 알 것 같은 마음이 찾아온다.
“아, 내가 왜 이렇게 힘들었는지 알겠다.”
“내가 반복하던 방식이 무엇인지 보인다.”
하지만 깨달음은 일상 속에서 계속 살펴지고 반복될 때 비로소 삶의 태도가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 익숙한 감정과 습관 속으로 미끄러진다.
마치 길을 알면서도 오래 걸어온 방향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나를 계속 들여다보는 일을 하나의 수행처럼 여기게 되었다.
작은 불쾌감도 그냥 덮지 않는다.
“별일 아니야.”
“그냥 지나가자.”
라고 넘기기보다 잠시 멈추어 바라본다.
왜 이 말이 불편했을까.
왜 이 상황에서 마음이 흔들렸을까.
이 감정은 지금의 사건 때문일까, 아니면 오래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까.
마음에 생기는 작은 불편함은 때로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신호가 된다.
작은 감정을 계속 외면하면 마음 한편에 웅덩이가 생기고,
해결되지 않은 감정들이 쌓이며 물이 흐려질 수 있다.
하지만 그때그때 바라보고 풀어내면 마음은 다시 맑아질 수 있다.
상담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바라보는 일이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일이기도 하다.
내담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종종 나 자신의 모습을 만난다.
“나는 이 사람의 마음을 충분히 보고 있는가.”
“혹시 나에게도 비슷한 결이 남아 있지는 않은가.”
“내가 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만나지 못한 마음은 없는가.”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과정은 결국 나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과 연결된다.
예전부터 나는 등을 밝히는 의식을 해왔다.
젊은 시절에는 주로 가족을 위해 등을 밝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고 느꼈던 시절,
나약한 내가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쩌면 그 등불은 무언가를 이루어 달라는 간절함이기도 했고,
가족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는 나만의 방식이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작은 깨달음이 생긴 이후, 오히려 그런 의식은 많이 줄어들었다.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가끔 절에 가게 될 때면 예전과는 다른 마음으로 작은 정성을 올린다.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라기보다, 그 공간을 지키고 운영하는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을 생각하게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마음을 보태는 것.
예전의 인등이 가족을 지켜달라는 마음이었다면,
지금의 인등은 연결된 존재들에게 감사와 정성을 전하는 마음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지금 내가 매일 홈페이지에 칼럼을 올리는 일 역시 나에게는 또 하나의 인등이다.
새 글을 올리면 빨간 표시가 뜬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면 사라진다.
그 짧은 표시가 나에게는 촛불처럼 느껴진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오늘도 작은 등 하나를 밝히는 마음.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또 하나의 마음을 발견했다.
“누가 보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나는 독자를 의식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라는 마음, 나의 언어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살피는 마음.
그 마음을 발견하면서 다시 나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다.
독자를 의식하는 것은 나를 잃는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타인을 고려하면서도 나의 자리를 잃지 않는 것이다.
상담에서도 그러하다.
상대의 마음을 존중하지만 필요한 이야기를 외면하지 않아야 하고,
나의 관점을 가지고 있지만 상대의 세계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아야 한다.
글쓰기도 결국 같은 자리인지 모른다.
나의 경험과 언어를 지키면서도 그것이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도록 마음을 여는 것.
AI 시대에 인등을 밝힌다는 것은 거창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매일 자신을 돌아보고, 작은 감정을 살피고, 경험 속에서 얻은 의미를 기록하는 것.
그리고 그 기록을 통해 나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 누군가와 연결되는 것.
오늘도 나는 문답으로 나를 비추고, 글쓰기로 마음의 거울을 닦는다.
내 안의 작은 불빛을 밝히면서, 그 빛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조용히 닿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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