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긴 사람, 담아 내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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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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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배추김치를 담갔다.
냉장고에는 네 통을 넣고, 한 통은 식탁 위에 두었다.
김치통이 하나씩 채워질수록 마음도 함께 든든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데 문득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의 냉장고는 늘 가득했다.
배추김치, 물김치, 열무김치, 깻잎김치, 총각김치….
갑자기 형제들이 찾아와도 언제든 밥상을 차릴 수 있을 만큼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 집에는 부엌방이 따로 있었는데, 그곳에도 늘 음식 재료가 있었다.
친구들은 우리 집을 떠올리면 그 부엌방을 기억하기도 했다.
한 번은 강의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떤 아이는 엄마 냉장고를 열며 "김치밖에 없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아이 입장이 이해가 되기도 하면서도,
세월의 차이를 느꼈다.
나에게 엄마의 냉장고는 '김치밖에 없는 냉장고'가 아니라 '언제든 먹을 것이 있는 냉장고'였기 때문이다.
같은 냉장고도 무엇이 들어 있었는가보다,
그 안에서 무엇을 느끼며 자랐는가에 따라 기억은 전혀 달라진다.
엄마는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조용한 사람이었다.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가끔 집에 내려가면 늦잠을 자곤 했다.
하지만 엄마는 아침을 먹으라며 깨우지 않았다.
부엌방에 밥상을 차려놓고 조용히 일하러 가셨다.
나는 늦게 일어나 엄마가 차려놓은 밥을 먹었다.
그때는 그것을 배려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엄마의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담을 오래 하면서 많은 내담자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성인이 되어 부모 집에 가면 기다렸다는 듯 잔소리가 시작되고,
잠시 쉬러 갔다가 오히려 더 지쳐 돌아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 이야기를 들을수록 우리 집은 참 조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돌아보면 엄마는 지친 딸이 집에서 푹 쉬었다가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 견딜 수 있도록 자신만의 방식으로 배려해 주었던 것 같다.
나는 오랫동안 엄마에게 말로 충분히 담기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사랑한다."
"수고했다."
"괜찮다."
그런 표현을 조금 더 많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말로는 부족했을지 모르지만, 행동으로는 충분히 담겼다는 생각.
늦잠을 자도 괜찮았던 집.
밥상이 기다리던 집.
냉장고가 늘 채워져 있던 집.
언제든 누군가 와도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던 집.
그 모든 것이 어쩌면 엄마가 보여준 사랑의 언어였는지도 모른다.
표현이 적은 엄마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나는 한편으로는 늘 말로 표현되는 사랑을 갈망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자연스럽게 말로 마음을 전하는 방식을 추구하게 되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엄마는 행동으로 나를 담아 주었고,
나는 그 사랑의 빈자리를 언어로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상담실에서 내가 가장 자주 하는 일도 결국 그것이다.
내담자의 감정을 말로 담아 주는 것.
"당신이 그렇게 느낀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그동안 정말 많이 버티셨네요."
"그 마음이 이해됩니다."
내담자는 그 말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처음으로 이해받고,
자신의 존재가 안전하게 담기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나는 엄마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같은 일을 하고 있다.
엄마는 말없이 밥상을 차려 놓고, 냉장고를 채워 두고, 쉴 수 있는 집을 만들어 나를 담아 주었다.
나는 상담실에서 언어를 통해 사람의 마음을 담아 낸다.
방식은 다르지만, 결국 둘 다 한 사람에게 '너는 여기 있어도 괜찮다'는 자리를 내어 주는 일이다.
어쩌면 나는 엄마에게서 받은 행동의 사랑을, 내 삶에서는 언어의 사랑으로 번역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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