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은 언제 빚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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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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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행동은 사랑에서 시작된다.
가족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아이를 위해 시간을 내고, 누군가를 위해 애쓰는 일에는 대부분 좋은 마음이 담겨 있다.
하지만 같은 행동이 어느 순간 누군가에게는 따뜻함이 아니라 빚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상담실에서 가족 갈등을 듣다 보면 이런 장면을 자주 만난다.
한 사람은 말한다.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아무도 몰라준다."
다른 사람은 말한다.
"자꾸 미안하게 만들어서 마음이 무겁다."
같은 정성이 한 사람에게는 사랑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부담이 되는 순간이다.
이러한 모습은 제사를 둘러싼 갈등에서도 자주 드러난다.
제사는 우리 문화 안에서 단순한 의례가 아니다.
돌아가신 분을 기억하는 마음, 가족이 이어져 있다는 감각, 부모와 조상에 대한 감사, 가족이 함께 모이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하지만 제사를 둘러싼 갈등을 상담실에서 만나다 보면, 그 안에는 또 다른 층위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게 된다.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아무도 몰라준다.”
라는 마음이다.
어릴 때 제사가 많은 집에서 자란 나에게 제사는 익숙한 일상이었다.
제사를 준비하는 어머니는 멀리 사는 고모들이 오지 않는 것을 서운해했다.
어린 시절에는 그 마음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가족이면 와야 하는 것 아닌가.”
어머니의 눈으로 고모를 바라보았고, 오지 않는 사람은 정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나는 고향을 떠나 다른 지역에 살게 되고,
일 년에 여러 번 있는 제사에 참석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하면서 보이는 것이 달라졌다.
그제야 알게 된다.
사람은 자신의 자리에서만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을.
제사를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기다림과 서운함’이 있고,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생활의 무게와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결혼 후 큰집 제사에 참석했을 때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음식을 준비하는 형님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그 표정을 보며 괜히 눈치를 보게 되었다.
작은 돈봉투를 준비해 건네면서도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그 돈은 감사의 표현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충분히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을 덜어내려는 마음도 섞여 있었던 것 같다.
그때 느꼈던 불편함은 돈의 문제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수고 앞에서 내가 빚진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후 내가 제사를 준비하는 위치가 되었을 때, 새로운 장면을 보게 되었다.
시부모님이 오시는 날이면 음식이 늘어나고,
오시지 않는 날이면 음식이 줄어드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 순간 생각이 많아졌다.
나는 왜 오는 사람의 수에 따라 준비하는 마음이 달라질까?
왜 누군가의 참석 여부가 내 정성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처럼 느껴질까?
아마 그 안에는 아주 인간적인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내가 준비한 것을 함께 나누고 싶다.”
“내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내 수고가 의미 있었으면 좋겠다.”
누구에게나 있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다.
문제는 정성이 아니라, 정성에 붙은 의미이다.
내가 선택한 사랑은 따뜻하다.
하지만 내가 한 희생을 상대가 반드시 알아주어야 한다고 느끼는 순간, 사랑은 빚이 된다.
“내가 너를 위해 이렇게 했다.”
라는 말은 때로 사랑의 표현이지만, 때로는 상대에게 갚아야 할 감정을 남긴다.
부모가 자녀에게,
배우자가 서로에게,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에게 같은 일이 일어난다.
내가 한 것을 스스로 의미 있게 여기지 못하면,
그 의미를 상대에게서 확인받으려 한다.
그러면 상대는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의 가치를 확인해주는 사람이 된다.
제사 갈등을 바라볼 때 한쪽만 옳다고 말하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제사를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나는 가족을 위해 애썼다.”
라는 진심이 있다.
하지만 참석하지 못하거나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에게도
“나의 삶과 상황도 존중받고 싶다.”
라는 진심이 있다.
한 사람의 정성이 다른 사람에게 의무가 되는 순간, 관계는 무거워진다.
건강한 관계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정성을 다했다.
그 의미는 내가 알고 있다.”
그때 상대는 내 정성을 갚아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사람이 된다.
부모도 마찬가지다.
좋은 부모는 자녀에게 인정받기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을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너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내가 선택한 것이었다.”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자녀도 부모의 사랑을 편안하게 받을 수 있다.
정성은 사랑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정성이 빚이 되는 순간은,
내가 한 사랑의 가치를 상대가 대신 증명해주기를 바랄 때이다.
결국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덜 사랑하는 법이 아니다.
사랑하되, 상대에게 내 가치를 증명하게 하지 않는 법이다.
정성은 나누면 사랑이 되지만, 인정받기 위한 증거가 되는 순간 빚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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