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포유
칼럼 포유
칼럼 포유

존재를 흔드는 감정, 비참함

페이지 정보

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
작성일26-07-13 21:03 조회73회 댓글0건

본문

상담을 하다 보면 사람들은 화가 난다고 말하고, 서운하다고 말하고, 슬프다고 말한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드물게 한 단어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다.


"비참했어요."


비참함은 흔히 사용하는 감정이 아니다. 그만큼 이 감정은 표면에서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대부분은 서운함이나 분노로 시작된다. 

누군가의 말에 상처를 받고, 억울함을 느끼고, 화가 난다고 말한다. 

하지만 상담을 통해 그 감정의 아래를 따라가 보면 미안함과 무력감, 좌절감이 나타나고, 그 끝에서 비로소 비참함을 만나는 경우가 있다.


비참함은 단순히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생기는 감정이 아니다.


누군가는 자신이 책임지고 싶었던 사람을 지켜주지 못했다고 느끼고, 

누군가는 오랫동안 헌신해 온 관계에서 자신의 마음이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느낀다. 

또 누군가는 자신의 판단과 노력이 아무 의미 없는 것처럼 취급되는 경험을 한다.


겉으로는 서로 다른 사건처럼 보이지만, 이들이 만나는 감정은 놀라울 만큼 비슷하다.


왜 비참할까.


그 순간 무너지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살아온 모습이기 때문이다.


책임감을 삶의 중심으로 살아온 사람은 자신의 책임이 무력화될 때 존재가 흔들리고,


누군가를 돌보고 보호하는 것을 삶의 의미로 살아온 사람은 자신의 돌봄이 거절되었다고 느끼는 순간 존재가 흔들린다.


비참함은 바로 이러한 경험 속에서 만들어진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심리적 과정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나는 이런 사람이고 싶다'​는 이상적인 자기(ideal self)를 마음속에 품고 살아간다. 

책임지는 사람, 믿을 수 있는 사람, 누군가를 지켜주는 사람, 좋은 부모, 좋은 동료와 같은 자기상이 그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건을 계기로 현실의 자신이 그 이상적인 자기와 너무 멀어졌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


'나는 사람을 지켜주는 사람이라고 믿었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나는 좋은 부모가 되고 싶었는데, 오히려 귀찮은 존재가 된 것 같다.'


이처럼 이상적인 자기와 현실의 자기 사이의 간극이 갑자기 크게 벌어질 때, 사람은 단순한 실망이나 좌절을 넘어 비참함을 경험한다. 

비참함은 실패 자체에서 오는 감정이라기보다, ​내가 되고자 했던 나와 지금의 내가 더 이상 연결되지 않는다고 느낄 때 찾아오는 감정이다.


비참함은 실패의 감정이 아니다.


수치심과도 조금 다르다.


수치심이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라는 감정이라면, 비참함은 '내가 가장 소중하게 살아온 내가 무너졌다'​는 경험에 가깝다.


그래서 비참함은 관계 속에서 자주 만들어진다.


내가 가장 많이 책임졌던 곳에서,


가장 많이 사랑했던 곳에서,


가장 많이 헌신했던 곳에서,


그 삶의 의미가 부정되었다고 느끼는 순간 사람은 비참함을 경험한다.


흥미로운 점은 비참함이 약한 사람에게서만 나타나는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책임감이 크고, 성실하며, 자신의 역할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일수록 더 깊은 비참함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만큼 자신의 존재를 역할과 가치 속에 담아 살아왔기 때문이다.


상담은 비참함을 없애는 일이 아니다.


그 감정이 무엇을 지키고 있었는지를 함께 발견하는 과정이다.


비참함은 언제나 한 사람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 온 삶의 가치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참함은 약함의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한 사람이 가장 진심으로 살아온 삶의 흔적이다.


회복은 비참함을 부정하는 데서 시작되지 않는다.


자신의 존재를 하나의 역할에만 기대어 세우지 않고, 여러 관계와 가치, 삶의 다양한 영역 위에 자기(Self)를 다시 세워 갈 때, 

비참함은 존재를 무너뜨리는 감정에서 삶을 이해하게 하는 감정으로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로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