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의 사막화가 가속화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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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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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 토양이 회복할 기회를 잃고, 생태계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조금씩 사막이 되어 간다.
자연은 끊임없이 생산만 하는 시스템이 아니다. 충분한 회복의 시간이 있을 때 숲은 다시 살아나고, 토양은 생명력을 유지한다.
하지만 인간은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며, 더 빠르게 성장하는 방향으로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
이러한 흐름은 풍요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자연에게는 회복할 시간을 빼앗았다.
생태계는 끊임없는 생산과 소비를 감당하지 못할 때 균형을 잃는다.
사람의 마음도 다르지 않다.
현대인은 더 많은 성과를 내고, 더 효율적으로 일하며, 더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도록 요구받는다.
쉬는 시간마저 자기계발이 되고, 관계마저 생산성과 효율성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는 사이 정서는 점점 회복할 시간을 잃어간다.
자연은 회복할 시간을 잃으면 토양이 메마르고, 사람은 회복할 시간을 잃으면 정서가 메마른다.
정서의 사막화는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감정을 느끼는 감각이 둔해지고,
자신의 슬픔을 알아차리지 못하며,
기쁨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위로받는 것조차 어색해지는 상태이다.
특히 혼자 버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러한 변화는 더 빠르게 진행될 수 있다.
사람은 감정을 표현하지 않으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순환시키는 능력을 조금씩 잃어간다.
처음에는 단단해진 것처럼 보인다.
웬만한 일에는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단단함은 유연함을 잃는다.
사막의 식물이 살아남기 위해 가시를 키우듯, 메마른 마음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를 키우기 시작한다.
본인은 그것을 성격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원칙적이어서 그렇고,
예민해서 그렇고,
효율적인 사람이라서 그렇다고 믿는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점점 그 가시에 상처를 입는다.
이해보다 판단이 앞서고,
공감보다 지적이 많아지고,
관계는 따뜻함보다 기능을 중심으로 유지된다.
정서의 사막화는 이렇게 관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물론 모든 사람이 같은 속도로 메말라 가는 것은 아니다.
집에서 충분한 위로를 받지 못해도 친구와의 관계에서 회복되는 사람이 있고,
직장에서 지쳐도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는 음악과 예술에서,
누군가는 자연 속에서,
누군가는 상담이나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정서를 다시 살아나게 한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의 관계가 아니라 여러 관계와 경험이 함께 지탱하는 생태계이기 때문이다.
회복의 샘이 여러 곳에 남아 있을수록 정서의 사막화는 늦춰질 수 있다.
결국 정서의 사막화는 개인의 의지 부족이 아니라, 회복보다 성과를 앞세우는 삶의 방식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자연에게는 지속가능성을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마음에는 끊임없는 생산만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태계는 회복보다 생산을 우선할 때 사막이 된다.
사람의 마음도 회복보다 생산성을 우선할 때 정서의 사막이 된다.
그래서 회복은 더 열심히 사는 데서 시작되지 않는다.
잠시 멈추어 자신의 감정을 느끼는 시간,
아무런 성과를 내지 않아도 존재를 환대받는 관계,
쓸모가 아니라 존재 자체로 연결되는 경험.
그런 시간들이 메마른 마음에 다시 물을 스며들게 한다.
사람은 생산성만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정서를 회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다시 살아 있는 존재가 된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성과만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다시 숲이 될 수 있는 정서의 생태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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