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포유
칼럼 포유
칼럼 포유

채움에서 깊음으로

페이지 정보

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
작성일26-09-24 16:25 조회19회 댓글0건

본문

명절이 되면 예전과 지금의 내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느낀다.


결혼 초의 명절은 지금 생각하면 꽤나 긴 여정이었다. 

큰댁 식구들의 제사를 돕기 위해 전날부터 움직이고, 

당일에는 제사를 지낸 뒤 시댁에 들러 음식을 준비하고, 

집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친정으로 향했다. 

그때는 그 많은 일을 명절이면 당연히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명절의 풍경도 조금씩 달라졌다. 

어른들이 돌아가시면서 제사의 수도 줄었고, 우리 집에서 지내던 제사만 남았다. 

그러다 약 5년 전 큰일을 겪으면서 제사를 모두 없앴고, 음식도 가족이 실제로 먹는 것 위주로 간소화했다.


돌이켜보면 명절에서 ‘해야 할 일’이 하나씩 사라지는 과정이기도 했다.


아이들이 집에 살던 시절에는 명절 음식을 많이 준비했다. 

좋은 재료를 사고 평소보다 특별한 음식을 만들었다. 

준비를 마치고 나면 가족과 함께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다. 

명절 음식은 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한 과정이기도 했다.


그런데 올해 추석은 조금 달랐다.


내가 과하게 준비하지 않으니, 오는 사람에게도 기대가 없었다.


많이 준비한 만큼 많이 알아주기를 바라지도 않았고, 

내가 한 만큼 돌려받기를 기대하지도 않았다.


필요한 만큼 준비하고, 함께 있는 시간을 함께 누리는 것으로 충분했다.


딸과 사위가 새벽 세 시에 출발해서 오전 10시 정도 집에 왔다. 

나는 점심과 저녁, 다음 날 아침을 준비했다. 

인원이 늘었으니 음식을 조금 더 만들고,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재료를 몇 가지 더 샀을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전혀 지치지 않았다.


올해 초 설을 떠올리면 차이가 더 선명하다. 

그때는 백화점에 잠시 들러 나에게 줄 귀걸이를 샀다. 

명절을 맞아 나 자신에게도 뭔가 특별한 것을 주고 싶었던 것 같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평소에도 나중을 위해 미루기보다 그때그때 내 몸이 원하는 것을 돌보려고 한다. 

그래서 명절이라고 해서 나를 특별히 채워야 할 필요가 없었다. 

이번 추석에는 머리를 조금 짧게 자른 것 정도가 전부였다.


대신 딸과 사위가 집에 들어오자 집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젊고 건강한 사람들의 존재가 공간을 묵직하게 만들었다. 

무거운 부담감과는 달랐다. 

저장 음식을 담가둘 때 음식이 국물 위로 떠오르지 않도록 돌 하나를 올려놓는 것처럼, 

그들의 존재가 내 삶을 잠시 눌러 깊게 만드는 느낌이었다.


함께 있어도 나는 나이고, 혼자 있어도 나는 나다.


그들이 잠이 들고 내가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왔을 때, 

그 묵직함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돌이 제자리로 돌아가듯 나도 다시 나의 자리로 돌아왔다.


예전에는 명절을 통해 내 삶을 채우려 했던 것 같다. 

더 좋은 음식, 더 많은 준비, 더 특별한 무언가를 더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내 일상에서 필요한 것을 조금씩 돌보고 있다. 

그래서 명절에 특별히 나를 채우지 않아도 된다.


대신 누군가의 존재가 내 삶을 잠시 깊게 해줄 수 있다.


채움은 부족한 것을 더하는 일이지만, 

깊음은 이미 있는 것에 시간이 머무는 일인지도 모른다.


올해 초 설에는 내 삶을 채우는 느낌이었다면, 

지금 추석은 내 삶이 잠시 깊어진 느낌이다.


명절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명절을 맞이하는 내가 달라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로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