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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장뚝배기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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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
작성일26-09-24 17:17 조회1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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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명절 음식과 함께 곁들일 된장찌개를 끓였다.


평소에는 먼저 큰 냄비에 육수를 내고, 그 안에 된장찌개 재료를 넣어 끓인 뒤 작은 뚝배기에 덜어 먹곤 한다. 

그런데 오늘은 시간이 부족해서 육수를 따로 내지 않고, 

처음부터 작은 뚝배기에 재료를 넣고 물을 부었다.


두부도 조금, 호박도 조금, 양파도 조금, 버섯도 조금, 고기도 조금.


재료를 넣으면서 뚝배기의 크기를 가늠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큰 냄비에 끓일 때와는 넣는 양이 자연스럽게 달라졌다. 

누가 적게 넣으라고 한 것도 아니고, 따로 계량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릇을 보면서 ‘이 정도면 되겠다’고 생각하며 양을 조절하고 있었다.


그 순간 생각했다.


그릇에 따라 나의 행동이 이렇게 달라지는구나.


뚝배기 속 재료는 유동적이지 않다. 

그릇이 작으면 단순히 들어가는 양이 줄어들 뿐이다. 

하지만 사람은 다르다. 

사람은 그릇 안에서 움직이고, 그 공간에 자신의 온기를 더하고, 그 공간과 다시 상호작용한다.


그래서 집의 크기도 비슷한 것 같았다.


신혼 때는 방 두 칸과 작은 거실이 있는 주택에서 살았다. 

두 사람일 때는 그 공간이 비좁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나고 물건이 늘어나면서 집이 좁아졌고, 

이후 방 세 개가 있는 아파트로 옮겼을 때는 가족의 생활에 적당한 크기였다. 

32평에서도 큰 무리 없이 살았고, 아이들이 자라면서 49평으로 옮겼다.


49평은 인테리어도 잘할 수 있었지만 이상하게 딱 맞는 느낌은 없었다. 

다시 35평으로 옮겼을 때 오히려 공간과 생활이 적당하게 맞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공간의 크기가 크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었다.


사람이 그 공간에서 어떻게 움직이고, 물건이 어떻게 자리를 잡고, 

가족의 생활과 온기가 어떻게 퍼지는지가 함께 맞아야 했다.


꾸밀 수 있는 것과 맞는 것은 달랐다.


이 생각은 자연스럽게 센터의 공간으로 이어졌다.


센터를 처음 열 당시 나는 지금보다 많이 위축되어 있었다. 

5년 전 여러 사건이 한꺼번에 있었고, 그때는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여유도 없었다. 

감각도 둔해져 있었고, 그저 최소한으로 살아야겠다는 정도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작은 공간을 보면서 ‘이 정도는 내가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8평의 공간에서 센터를 시작했다.


당시의 나에게는 그 공간이 적합했을 것이다. 

그런데 센터를 운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8평으로는 

여러 정부 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는 이미 공간을 다시 선택하기에는 늦었다고 느꼈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문제는 단순히 공간이 작았다는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큰 충격을 받으면 사람은 위축되고 몸을 구부린다. 

주변으로 숨고, 자신을 실제보다 작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삶의 크기도 실제보다 작게 가늠하게 된다.


그때의 나는 작은 공간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 아니라, 

어쩌면 나 자신을 작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다시 나의 감각과 에너지가 돌아오면서 알게 되었다.


8평은 당시의 내가 머물기에는 적합했지만,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에너지까지 충분히 담을 수 있는 공간인가 하는 질문은 또 다른 문제였다.


센터의 공간은 나만 담는 그릇이 아니었다. 

상담자와 내담자가 함께 머물고, 침묵과 감정과 이야기와 관계의 움직임이 오가는 공간이었다. 

나에게 맞는 공간과 다른 사람의 에너지까지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은 같은 질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 그릇의 윤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그릇을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아는 것이 가능할까.


아마 쉽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은 자기 그릇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큰 충격을 받은 시기에는 자신을 바라보는 감각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내가 무엇을 얼마나 담을 수 있는지를 경험하는 것은 가능하다.


무엇을 했을 때 자연스럽게 에너지가 움직이는지, 어디에서 힘이 빠지는지, 

어느 정도의 일을 하면 삶이 풍성해지는지, 

어느 순간부터 넘치기 시작하는지를 경험하면서 자기 그릇의 윤곽을 조금씩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그릇을 안다는 것은 ‘나는 원래 이만큼의 사람이다’라고 자신을 규정하는 것과도 다르다.


지금의 내가 어느 정도를 담을 수 있는지,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 어떤 크기의 공간이 필요한지를 계속 경험하며 알아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또 하나 알게 된다.


그릇은 단순히 내가 담을 수 있는 양만 결정하지 않는다.


그릇이 행동을 만든다.


작은 뚝배기를 앞에 놓으면 나는 자연스럽게 재료를 조금씩 넣는다. 

큰 냄비를 앞에 놓으면 더 많이 준비한다. 

사람도 자신이 놓인 공간과 역할과 환경에 따라 움직임과 행동의 크기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니 내가 어떤 그릇을 선택했는지는 내가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사람은 음식 재료와 다르다.


사람에게는 온기가 있다.


사람은 공간에 맞춰 움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온기로 그 공간의 의미를 바꾼다. 

집은 사람의 생활을 담으면서 가족의 온기를 품고, 

센터는 상담자와 내담자의 에너지가 오가는 동안 단순한 사무실 이상의 공간이 된다.


그래서 나에게 맞는 그릇의 크기는 단순히 얼마나 많이 담을 수 있느냐로 결정되지 않는 것 같다.


그 안에서 나의 에너지가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는가.
내가 가진 온기가 그 공간 안에서 살아날 수 있는가.
그리고 나뿐 아니라 내가 만나는 사람의 에너지까지 담을 수 있는가.


어쩌면 그것이 내가 찾아야 할 그릇의 크기일 것이다.


작은 그릇이 나쁜 것도 아니고, 큰 그릇이 좋은 것도 아니다.


다만 한때 작아진 내가 선택했던 그릇을 본래의 나의 크기라고 착각하지 않는 것.

그리고 반대로 큰 그릇을 가졌다고 해서 반드시 그만큼을 채워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내가 담을 수 있는 만큼을 알고, 내가 담고 싶은 것을 알고, 그 둘이 만나는 지점을 찾아가는 것.


오늘 된장찌개를 끓이며 알게 되었다.


뚝배기의 크기를 가늠하며 재료의 양을 조절하던 작은 행동 하나에도, 어쩌면 삶의 방식이 들어 있었다.


그릇은 행동을 만들고, 사람은 그릇에 온기를 더한다.


그리고 우리는 살아가면서 조금씩 자기 그릇의 윤곽을 알아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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