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의 축에서 내려오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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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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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을 비교한다.
키가 작은 사람은 자신보다 큰 사람을 보고, 꽤 큰 사람도 자신보다 더 큰 사람을 만나면 작게 느낀다.
작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내가 조금 더 크다는 사실에 안도하기도 한다.
내 키는 그대로인데,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 내가 느끼는 나의 위치는 달라진다.
어쩌면 비교란 나의 속성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위치감각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위도 보고 아래도 보면 된다”는 말만으로는 비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위를 보면 작아지고, 아래를 보면 조금 커지고, 다시 더 위를 만나면 작아진다.
비교의 대상이 바뀔 뿐, 나는 계속 비교의 축 위에 서 있게 된다.
한동안 나도 외모에서 그런 경험을 했다.
나이가 들면서 얼굴에 나타나는 흔적을 조금씩 가리려고 화장을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나보다 훨씬 젊고 예쁜 사람이 자신의 모습을 지나치게 화장으로 가리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오히려 자연스러움이 가려져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나도 지금 누군가에게는 저렇게 보일 수 있겠구나.’
특히 나보다 십 년쯤 더 나이 많은 사람이 나를 본다면,
내가 그 젊은 사람을 바라보며 느꼈던 것과 비슷한 마음이 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화장을 조금씩 내려놓았다.
썬크림 정도만 바르고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얼굴의 흔적을 없애야 한다는 생각에서,
지금의 나에게 나타난 흔적도 내 나이의 얼굴이라는 생각으로 옮겨간 것이다.
돌이켜보면 외모의 비교에서 조금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것은 외모에 대한 생각이 달라져서만은 아니었다.
내면의 축이 조금씩 단단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인 것 같다.
비교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과 비교 속에서도 나를 잃지 않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얼마 전 딸과 출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딸은 아이를 갖는 것이 경제적으로 부담스럽고, 아이를 어떤 집에서 키울지,
어떤 교육을 시킬 수 있을지 걱정된다고 했다.
비슷한 환경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자신이 아이를 낳았을 때 감당해야 할 미래가 어느 정도인지 보이는 것 같았다.
그 마음이 이해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딸 부부가 우리 집에 오면 내가 느끼는 풍성한 행복을 딸도 느껴보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다.
그래서 ‘꼭 위를 보지만 말고 아래도 보면 어떻겠느냐’는 이야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생각해보면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딸이 보고 있는 것은 단순히 남보다 잘살고 싶은 욕구가 아니라,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비교하게 될 미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집에 사는지, 무엇을 해주는지, 어떤 교육을 받는지,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면서 부모로서 부족하지 않아야 한다는 부담을 예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비교의 대상을 아래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비교의 축 자체에서 조금씩 내려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봉사를 하거나 어려운 사람을 만나면 내 고민이 작아지고,
화장터에 다녀오면 삶의 본질을 생각하게 된다는 말을 흔히 한다.
물론 그런 경험이 시야를 넓혀줄 수 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새로운 비교의 기준을 가져오는 것일 수 있다.
‘나보다 어려운 사람이 있구나.’
‘결국 사람은 누구나 죽는구나.’
강한 외부 자극이 기존의 비교를 잠시 상대화할 수는 있지만,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경험하는 수많은 자극 속에서 비교는 다시 시작된다.
우리는 오감으로 세상을 받아들이고,
그 세상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교에서 자유로워지는 일은 외부의 자극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그 자극을 받아들이면서도 나를 판단하는 기준을 내 안에 갖는 일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한 사람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 참석한 후
자신보다 더 잘난 사람들을 만나고 오면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다.
이런 자리에 계속 가는 것이 좋은지 물었다.
그 사람의 고민이라서인지 그 질문은 어렵지 않았다.
그 자리에 가서 마음이 불편하더라도 내가 얻는 것이 있다면 갈 수 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거나,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내 삶에 의미 있는 경험이 된다면 어느 정도의 불편함은 감당할 수 있다.
하지만 얻는 것보다 스트레스가 크다면 굳이 갈 필요가 있을까.
그때 나는 오히려 그 사람이 그 자리에 가는 이유를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느꼈던 것 같다.
나를 위해 가는 것인지, 아니면 사회적 시선을 의식해서 가는 것인지.
내면의 축이 있다는 것은 외부의 기준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외부의 기준을 보면서도 ‘나는 이것을 원하는가’, ‘이 경험이 나에게 무엇을 주는가’,
‘이 비용을 내가 감당할 만한가’를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학력에 대해서는 아직 나도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어떤 부부가 대학에 바로 입학한 것과 재수해서 입학한 것을 두고
누가 더 우위인지 다투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 모습을 보며 씁쓸했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해본다.
어쩌면 바로 입학했다는 사실이 단순한 이력 하나가 아니라
‘나는 한 번에 해내는 사람’, ‘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자기감각과 연결되어 있다면,
그 능력을 내려놓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울 것이다.
무언가를 잘했다는 사실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증명해주던 나까지 내려놓아야 한다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학력이라는 비교의 축에서는 아직 완전히 내려오지 못했다.
어쩌면 언젠가 내가 먼저 ‘나는 이런 학교를 나왔어요’라고 자연스럽게 고지할 수 있다면 조금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자랑도 아니고 변명도 아니고 숨김도 없이, 그저 내 삶에 있었던 하나의 사실로 말하는 것.
하지만 아직은 그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비교에서 자유롭다고 말하기보다,
내가 어떤 비교의 축에서는 내려왔고 어떤 축에서는 아직 그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아가는 중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최근 브런치에 들어가 수많은 글을 한꺼번에 보면서 잠시 흔들렸던 것도 같은 경험이었다.
글을 잘 쓰는 사람, 오래 쓴 사람, 많은 독자를 가진 사람을 보며 나도 모르게 나의 위치를 확인하려 했다.
그러나 미술관에서 서로 다른 수준의 작품을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초보자의 작품도 있고 뛰어난 작품도 있었지만, 그 안에는 저마다의 결이 있었다.
사람마다 살아온 시간이 다르고, 그 시간이 만들어낸 결도 다르다.
어떤 결은 곱고 어떤 결은 거칠다.
어떤 사람은 오래 다듬었고 어떤 사람은 이제 막 시작한다.
그러나 그 차이가 반드시 우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도 나의 결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결이 있다.
그때 나는 비교의 세계에서 공존의 세계로 조금 이동할 수 있었다.
비교할 수 있는 것과 비교해야 하는 것은 다르다.
키는 숫자로 비교할 수 있고, 학력도 어느 정도 서열화할 수 있으며, 글도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비교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살아온 시간과 그 시간이 만들어낸 고유한 결까지 같은 자로 재기는 어렵다.
그래서 비교의 축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비교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비교는 아마 계속 일어날 것이다.
외부의 자극에 흔들리는 것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흔들린 뒤에 다시 내 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저 사람보다 내가 나은가?’에서
‘나는 이것을 원하는가?’로.
‘나는 어디쯤에 있는가?’에서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로.
질문이 바뀌는 것.
결국 비교의 축에서 내려오는 일은 내면의 축이 단단해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외부의 기준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기준이 내 삶의 방향을 결정하지 못하도록 내 선택의 권한을 조금씩 내 안으로 가져오는 일.
아직 나는 모든 비교의 축에서 내려오지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는 조금씩 보인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시작일 것이다.
비교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비교 속에서도 나를 잃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
그렇게 하나의 축에서 내려오고, 또 하나의 축에서 내려오면서 내 안에 나만의 축을 세워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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