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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이름, 하나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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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
작성일26-09-26 12:59 조회1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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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두 개다.


어릴 때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은 은숙(銀淑)이었다.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이다. 

은은 은(銀), 숙은 맑을 숙(淑). 은처럼 귀하고 맑게 살라는 뜻이었을까.


내가 자란 세대에는 은숙이라는 이름이 흔했다. 

한 반에 같은 이름을 가진 아이가 몇 명씩 있었고, 

우리는 큰 은숙, 작은 은숙, 공부 잘하는 은숙처럼 불리기도 했다.


그래서 한동안은 그 이름을 그저 그 시대에 흔했던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니 이름에는 아버지가 딸에게 기대했던 삶의 모습도 담겨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실제로 그 이름과 꽤 닮은 삶을 살았다. 

크게 튀지 않고, 주변을 살피고, 맡은 역할을 해내고, 관계의 가운데에서 균형을 맞추며 살아왔다. 

주어진 자리에서 맑게,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삶에서 큰 흔들림을 겪은 뒤 이름을 바꾸었다. 

은숙에서 여원(予源)이 되었다.


여원이라는 이름은 내가 선택했다. 

여(予)는 나 여, 원(源)은 근원 원. 나에게 준다, 

그리고 근원에서 나온다는 의미로 나는 이 이름을 받아들였다.


예전에는 강줄기의 끝이나 샛강에서 흩어져 나누어 주었다면, 

이제는 샘의 근원에서 더 깊은 것을 나누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그때의 개명은 내 삶의 방향을 바꾸겠다는 선언처럼 느껴졌다.


부모가 기대한 이름대로 살아가는 삶에서, 

내가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삶을 선택하겠다는 선언 중 하나가 이름이었다.


한동안은 두 이름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었다. 

은숙은 감추어야 할 이름처럼 느껴졌고, 

여원은 내세워야 할 이름처럼 느껴졌다. 

은숙으로 돌아가면 안 되고 여원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름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도 달라졌다.


이제는 은숙을 감출 필요도, 여원을 굳이 내세울 필요도 없다.


이름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은숙으로 살아온 시간도 나의 삶이고, 

그 이름 안에서 내가 했던 선택과 관계와 경험도 모두 나다. 

여원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시간 역시 나의 삶이다.


은숙이 부모가 바랐던 삶의 방향을 담은 이름이었다면, 

여원은 내가 살아오면서 새롭게 발견한 삶의 방향을 담은 이름일 수 있다. 

그렇다고 두 이름 중 하나가 옳고 다른 하나가 틀린 것은 아니다.


나는 은숙으로 살아오며 많은 것을 배웠고, 

그 삶을 지나왔기에 여원이라는 이름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과거의 나를 없애는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지금까지 살아온 나를 데리고, 내가 선택한 방향으로 이동하는 일이었다.


두 개의 이름이 있지만 삶은 하나다.


그리고 요즘 글의 제목을 찾아가는 일을 하면서 이 이름 이야기가 다시 떠오른다.


좋은 제목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글 안에 있는 것을 가장 잘 닮은 이름을 찾아주는 일.


사람도 글도 먼저 존재가 있고, 이름은 그 뒤에 온다.


이름이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삶이 그 이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은숙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나와 여원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나는 서로 다른 사람이 아니다.


두 개의 이름을 지나왔지만, 결국 내가 살아온 삶은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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