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포유
칼럼 포유
칼럼 포유

내 안의 작은 신호가 말해 주는 것

페이지 정보

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
작성일26-10-01 13:42 조회20회 댓글0건

본문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을 한다.


무엇을 공부할지, 어떤 일을 할지, 누구와 관계를 맺을지, 자녀를 어떻게 키울지 결정한다.


그런데 그 선택의 기준이 늘 나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기대와 평가, 사회가 정해놓은 기준, 가족에게서 물려받은 방식이 나보다 먼저 선택을 내린다.


특히 가까운 관계에서는 내가 느끼는 것보다 상대가 어떻게 생각할지를 먼저 살피게 된다. 

상대가 나를 인정해주면 마음이 놓이고, 상대가 실망하면 불안해진다. 아이가 결혼하면 안도하고, 

결혼하지 않으면 좌불안석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내 느낌을 결정하는 힘이 어느새 상대의 손에 넘어가 있다.


내 삶의 칼자루를 다른 사람에게 건네준 셈이다.


그렇다면 내 삶의 방향을 어떻게 다시 나에게 가져올 수 있을까.


나는 그 시작이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느낌은 화가 난다고 소리를 지르거나, 

억울하다고 울분을 쏟아내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느낌에 대한 행동화일 수 있다.


느낌은 그보다 앞선 곳에서 아주 작게 나타난다.


뭔가 찜찜하다.
마음이 불편하다.
개운하지 않다.
이건 아닌 것 같다.
이상하게 마음에 걸린다.

이쪽을 생각하면 조금 마음이 놓인다.


이런 작은 신호들이다.


우리는 흔히 이런 신호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별것 아니겠지.”
“내가 예민한가 보다.”
“다들 이렇게 사는데.”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모른 채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작은 신호는 때로 내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알려준다.


그 신호를 알아차리고

“나는 지금 무엇이 불편하지?”
“무엇이 마음에 걸리지?”
“나는 어떤 느낌으로 살고 싶은가?”


를 묻다 보면 비로소 내 삶의 방향이 보이기 시작한다.


중요한 것은 느낌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느낌을 알아차리고, 그 의미를 살펴보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어떤 선택은 처음에는 불안할 수도 있다.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긴장과 평가, 경쟁 속에서 살아온 사람에게는 오히려 그런 환경이 익숙해서 안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나침반은 당장 편안한 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지를 향한 방향을 알려주는 것이어야 한다.


이런 구분은 아이를 이해할 때도 중요하다.


어린아이는 자신의 상태를 정확한 언어로 표현하기 어렵다. 

속상한지, 서운한지, 무서운지, 질투가 나는지조차 구별하지 못할 수 있다.


이때 부모가

“네가 지금 속상했구나.”
“하고 싶은데 안 돼서 화가 났구나.”


라고 아이의 경험에 말을 붙여주면, 아이는 자신의 내면을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얻는다.


반대로 자기 마음이 충분히 담기고 이해되는 경험이 적으면, 

아이는 자신의 느낌을 알아차리고 말로 표현하기보다 행동으로 먼저 드러낼 수 있다.


서운함, 두려움, 억울함, 외로움 같은 마음이 아직 분화되지 못한 채 한꺼번에 ‘화’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래서 겉으로는 분노가 너무 큰 것처럼 보여도 그 안에는 아직 말이 되지 못한 여러 마음이 함께 있을 수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은 단순히 “화를 내지 마”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네가 지금 많이 화가 났구나.”
“무엇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났는지 한번 찾아보자.”
“하고 싶었던 것을 못 해서 속상했을 수도 있겠다.”


이렇게 아이의 행동 아래에 있는 마음을 찾아주고 담아주는 경험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행동화를 허용한다는 뜻은 아니다.


느낌은 받아주되 행동에는 경계를 세워야 한다.


화가 나는 것은 괜찮지만 사람을 때리는 것은 안 된다.
서운한 것은 괜찮지만 물건을 던지는 것은 안 된다.
싫은 것은 괜찮지만 상대를 모욕하는 것은 안 된다.


아이가 자신의 느낌을 알아차리고 말로 표현할 수 있도록 도우면서, 

동시에 그 느낌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에는 분명한 경계를 세우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아이는 조금씩 배운다.


‘내가 느끼는 것은 없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구나.’
‘내가 화가 난 데에는 이유가 있구나.’
‘내 마음을 말로 표현할 수 있구나.’
‘내가 느끼는 것과 내가 행동하는 것은 다른 것이구나.’


이것이 쌓이면 아이는 자신의 느낌을 행동으로 먼저 쏟아내기보다, 

그것을 알아차리고 말로 다루고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그런데 아이에게 자기 마음을 알아가는 법을 알려주려면 

부모 자신도 자기 마음을 알아차리고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부모가 자신의 마음은 모른 채 아이에게만 “네 마음을 잘 들여다봐”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부모가

“엄마는 지금 속상해.”
“나는 이것은 원하지 않아.”
“네가 서운할 수 있다는 것은 알아. 그래도 나는 이렇게 선택하고 싶어.”


라고 자신의 마음과 선택을 구분해서 말할 수 있다면, 

아이는 관계 안에서 자기 마음을 알아차리고 표현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이것은 아이가 성장할수록 더욱 중요해진다.


어린아이일 때는 부모가 많은 것을 결정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아이가 성장할수록 부모의 결정권은 조금씩 아이에게 돌아가야 한다.


학원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직업으로, 

직업에서 결혼으로 삶의 영역이 넓어질수록 아이는 자기 삶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부모가 아이를 자신의 수족처럼 여기거나 아이의 삶을 자신의 책임으로 느끼면 그 결정권을 내려놓기가 어려워진다.


“좋은 학원에 보내야 한다.”
“좋은 학교에 가야 한다.”
“좋은 직업을 가져야 한다.”
“좋은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


처음에는 아이를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기준이 부모 자신의 불안이나 인정 욕구를 달래기 위한 것이 될 수도 있다.


특히 부모 자신이 원가족에서 지나치게 무거운 책임을 맡고 

살아온 경우라면 자녀의 삶까지 자신의 책임으로 느낄 가능성이 있다.


장성한 자녀가 결혼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결혼하면 비로소 마음이 놓이는 경우가 그렇다.


하지만 아이의 결혼 여부가 엄마의 마음을 결정한다면, 

엄마 자신의 느낌을 아이의 삶에 맡기고 있는 셈이다.


자녀가 좋은 배우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마음이다. 

그러나 부모가 생각하는 조건에 맞는 배우자를 자녀가 선택하지 않는다고 해서 

계속 반대한다면 자녀가 자신의 선택을 부모와 나누지 않게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부모가 정말 원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자녀의 결혼 자체가 아니라, 자녀가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는 것이었다면 부모가 자신의 기준으로 자녀의 선택을 통제하는 일은 오히려 그 행복에서 자신을 멀어지게 할 수 있다.


자녀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것은 자녀의 모든 선택에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다. 

위험하거나 심각한 문제가 있는 관계라면 부모가 우려를 말하고 필요한 도움을 주는 것도 부모의 역할이다.


다만 부모의 기준과 자녀의 삶에 실제로 문제가 있는 것은 구별할 필요가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아이의 삶을 대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자기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리고 부모에게도 자신의 삶이 있다.


아이에게 인정받고 싶고, 존중받고 싶고, 

언젠가 “엄마, 나를 잘 키워줘서 고마워”라는 말을 듣고 싶은 마음도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 말이 내 삶의 보상이 되어버리면 아이의 반응에 따라 나의 행복도 함께 흔들릴 수 있다.


아이의 미래가 어떠할지는 내가 결정할 수 없다. 

아이가 부모의 노력을 어떻게 기억하고 어떤 말을 해줄지도 내가 결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어떤 부모로 살고 싶은가.”
“아이를 키우면서 어떤 느낌으로 살고 싶은가.”
“아이와 어떤 관계를 만들어가고 싶은가.”

이 질문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아이에게 인정받기 위해 좋은 부모가 되는 것과,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방식으로 아이를 키우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아이의 반응을 필요로 하지만, 

후자는 내가 어떤 부모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아이에게서 받고 싶었던 인정의 뿌리가 훨씬 오래된 곳에 있을 수도 있다.


어린 시절 나의 부모에게 듣고 싶었던 말, 

충분히 받지 못했던 인정과 존중을 내가 아이에게서 받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아이에게 내 미결 과제를 풀게 하기보다 

내가 내 삶에서 그것을 다시 바라보고 내 몫으로 가져오는 일이 필요하다.


세대 간에는 행동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책임을 떠안는 방식, 인정받는 방식, 사랑하는 방식, 

상대의 삶을 대신 책임지는 방식도 전해질 수 있다.


하지만 전수는 반드시 계속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세대에서 그 흐름을 알아차리고 멈추어 다른 반응을 선택할 수 있다.


“나는 이렇게 배웠지만, 내 아이에게도 똑같이 할 것인가?”
“내가 받은 것을 그대로 다음 세대에 넘길 것인가?”
“아니면 여기에서 한 번 다르게 살아볼 것인가?”

그때부터 다른 전수가 시작될 수 있다.


생존을 위해 상대의 반응을 살피는 삶에서,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묻는 삶으로.

상대가 어떻게 해야 내가 괜찮아지는 삶에서, 상대가 어떠하더라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삶으로.


내 안의 작은 신호를 알아차리는 일은 그래서 단순히 내 기분을 살피는 일이 아니다.


그 신호를 통해 내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불편해하며,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알아가는 일이다.


그리고 그 알아차림을 바탕으로 내가 선택할 때, 내 삶의 칼자루는 다시 내 손에 돌아온다.

아이에게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법을 가르치는 가장 좋은 방법도 어쩌면 거기에 있을 것이다.

부모가 먼저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자신의 선택을 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

아이의 삶은 아이에게 돌려주고, 내 삶은 나에게 돌려주는 것.

그렇게 한 사람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가는 모습은 말보다 더 깊은 언어로 다음 세대에 전해질 수 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로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