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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나를 같은 눈으로 바라봐 주는 사람의 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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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
작성일26-07-02 13:47 조회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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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 그레고리 베이트슨(Gregory Bateson)은 가족 안에서 반복되는 독특한 의사소통 구조를 이중구속(Double Bind)이라고 설명했다.


이중구속은 단순히 모순된 말을 듣는 상황이 아니다.


서로 충돌하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받으면서도 그 모순을 말할 수도, 관계를 벗어날 수도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틀리고,


어느 선택도 안전하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모순 자체를 문제 삼을 수 없다는 점이 이 구조의 핵심이다.


아이는 결국 현실을 해석하기보다 살아남기 위해 관계를 해석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얼마 전 만난 한 사람의 삶이 그랬다.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한 살 많은 언니가 자연스럽게 부모의 역할을 대신했다.


언니는 때로는 아버지처럼 규칙을 가르쳤다.


"밖에서는 이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본다."


하지만 동시에 엄마처럼 감정적으로 반응했다.


기분이 좋을 때는 걱정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왔고,


기분이 상하면 작은 행동도 날카롭게 지적했다.


어떤 날에는 보호자였고,


어떤 날에는 심판자였으며,


어떤 날에는 언니였고,


어떤 날에는 부모였다.


역할은 계속 바뀌었고,


그에 따라 기준도 함께 흔들렸다.


오늘은 허용되던 것이 내일은 잘못이 되었고,


오늘은 보호였던 말이 내일은 무능에 대한 평가가 되었다.


이중구속의 핵심은 혼란 자체가 아니다.


어떤 모습의 내가 진짜 나인지 끝내 확신하지 못하게 되는 구조다.


이런 환경에서 아이는 규칙을 배우지 못한다.


대신 사람의 기분을 읽는 법을 배운다.


"무엇이 옳은가?"


보다


"지금 이 사람은 어떤 상태인가?"


를 먼저 살피게 된다.


이중구속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종종 타인의 감정에 민감하고 배려심이 깊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공감이라기보다 생존 전략인 경우가 많다.


더 깊은 문제는 자기(Self)의 형성이다.


사람은 혼자 자신을 만들어 가지 않는다.


자신을 반복해서 비춰 주는 타자의 시선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를 배운다.


잘했을 때도 같은 사람으로,


실수했을 때도 같은 사람으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을 때도 같은 사람으로 바라봐 주는 경험이 반복될 때,


사람은 행동과 존재를 구분하기 시작한다.


"내 행동은 수정될 수 있지만,


나는 버려지는 존재가 아니다."


이 감각이 자기감(Self)의 중요한 토대가 된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는 그런 경험이 없었다.


그에게는 같은 나를 같은 눈으로 바라봐 주는 사람이 없었다.


거울은 늘 흔들렸고,


거울 속의 자신도 함께 흔들렸다.


상담이 진행되면서 그는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다.


"저는 꼭두각시 같아요."


이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꼭두각시는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다.


줄이 당겨질 때만 움직인다.


이중구속 속에서 성장한 사람도 비슷하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보다,


타인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먼저 확인한다.


자신의 감정보다 상대의 기분이 우선되고,


자신의 판단보다 외부 기준이 먼저 작동한다.


그렇게 살아온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람은 자신의 욕구를 잃어버린다.


정확히 말하면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느끼는 방법 자체를 배우지 못한 것에 가깝다.


상담에서 중요한 변화는 설명보다 작은 경험에서 시작된다.


이 사람은 짧은 역할극을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언어를 만들어 보기 시작했다.


언니가


"밖에서는 그러면 안 된다."


라고 말하는 상황을 상상하며 그는 말했다.


"내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그리고 언니가


"어떻게 알아서 할 건데?"


라고 묻는 장면에서는 이렇게 연습했다.


"언니가 나를 못 믿으면 누가 나를 믿겠냐?"


이 말들은 단순한 말싸움의 기술이 아니다.


오랫동안 외부 기준에 의해 움직이던 사람이 처음으로 자신의 판단이 설 자리를 만들어 보는 과정이었다.


상담 중 그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야기를 꺼냈다.


현재 우울 증상을 겪고 있는 자신이 혹시 우울을 핑계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겉으로 보면 자기 성찰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임상적으로는 조금 더 신중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중구속 속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에게


'혹시 내가 핑계를 대는 건 아닐까?'


라는 질문은 쉽게 익숙한 자기비난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잘해야 한다.'


'잘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나는 게으른 사람인가?'


이 흐름은 오래된 내부 처벌 회로를 다시 활성화한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더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상태를 절대적인 사실이 아니라 해석하고 탐색할 수 있는 경험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즉, 언니의 기준과 자신의 경험 사이에 처음으로 작은 틈이 생긴 것이다.


이중구속의 가장 깊은 영향은 혼란이 아니다.


같은 나를 같은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내면의 시선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회복 역시 거창한 자유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내 판단은 틀릴 수도 있지만,


그 판단은 내 것일 수 있다."


이 감각을 조금씩 회복하는 데서 시작된다.


상담은 그 감각이 처음으로 허용되는 공간이 된다.


잘했을 때도 같은 사람으로,


실수했을 때도 같은 사람으로,


여전히 존중받는 존재로 머물 수 있는 경험.


그 경험이 반복될수록 사람은 더 이상 타인의 손에 매달린 꼭두각시로 살아가지 않는다.


조금씩 자신의 삶의 줄을 자신의 손으로 붙잡기 시작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다른 사람의 눈이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도 같은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 순간, 이중구속은 더 이상 그 사람의 삶을 움직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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