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위계가 뒤집힌 상태 페이지 정보 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 작성일26-06-24 15:37 조회77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상담을 하다 보면 때때로 이상한 장면을 만난다. 어떤 내담자는 자신의 문제를 누구보다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왜 힘든지, 언제부터 그랬는지, 어떤 성장 배경이 영향을 주었는지, 심지어 자신의 성격적 특징까지 분석한다. 그런데 정작 "지금 어떤 감정이 드시나요?"라는 질문에는 멈춰 선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답답합니다." "머리가 복잡합니다." 생각은 많은데 감정은 희미하다. 그런데 몸은 이미 말하고 있다. 잠이 오지 않고,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조여오고, 위장은 긴장되어 있다. 몸은 무언가를 알고 있는데 의식은 그것을 모른다. 인간의 발달을 생각해 보면 이 모습은 다소 역설적으로 보인다. 아이는 생각으로 세상을 만나지 않는다. 먼저 몸이 반응한다. 배고프면 울고, 놀라면 움찔하고, 무서우면 매달린다. 이후 양육자는 아이의 경험에 이름을 붙여 준다. "무서웠구나." "놀랐구나." "화가 났구나." 그렇게 원초적인 신체 경험은 감정이 되고, 감정은 생각이 되고, 생각은 언어가 된다. 비온의 표현을 빌리면, 아직 소화되지 않은 감각과 정동은 베타 요소(β-elements) 상태로 존재한다. 그리고 양육자의 마음은 그것을 받아들여 알파 기능(alpha function)을 통해 생각할 수 있는 경험으로 변환한다. 아이가 스스로 감정을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그런데 상담실에서는 종종 다른 모습을 본다. 몸은 이미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심장은 빨리 뛰고, 근육은 긴장하며, 실패를 상상하면 몸이 얼어붙는다. 그러나 정작 내담자는 말한다. "무서운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대신 이렇게 이야기한다. "제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이상하게 볼 것 같아요." "창피합니다." 표면에 나타나는 것은 수치심이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따라가 보면 그 아래에는 두려움이 존재한다. 비난받을까 두렵고, 거절당할까 두렵고, 버려질까 두렵고, 존재가 부정당할까 두렵다. 나는 이것을 감정의 위계가 뒤집힌 상태 라고 부르고 싶다. 원래 두려움은 매우 원초적인 정동이다. 수치심은 타인의 시선과 자기 인식이 형성된 이후 나타나는 훨씬 복잡한 감정이다. 발달의 순서로 보면 두려움이 먼저이고, 수치심은 나중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두려움을 직접 경험하지 못하고 수치심만 경험한다. 무섭다는 말은 하지 못하지만, 창피하다는 말은 한다. 불안하다는 말은 하지 못하지만, 자신이 문제라는 말은 한다. 감정의 위계가 뒤집혀 있는 것이다. 라캉의 언어를 빌리면 이것은 흥미롭게 이해될 수 있다. 라캉은 인간 경험을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로 설명했다. 실재계는 아직 말이 되지 못한 경험이다. 몸의 긴장, 설명되지 않는 공포, 이름 붙여지지 않은 정동이 여기에 속한다. 상징계는 언어의 세계다. 우리는 상징계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설명하고 이해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실재계에서 올라오는 두려움을 충분히 느끼기도 전에 곧바로 상징계로 이동한다. "나는 부족한 사람이다." "나는 무능하다." "나는 창피하다." 실재적 두려움은 사라지고 자기비난의 언어만 남는다. 몸은 두려워하고 있는데 의식은 수치심만 말한다. 강박적인 사람들에게서 이런 현상이 특히 자주 나타난다. 그들은 생각이 매우 많다. 하지만 생각이 많다는 것이 반드시 감정을 잘 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생각이 감정을 대신하는 경우도 많다. 슬픔은 분석으로 바뀌고, 분노는 설명으로 바뀌고, 두려움은 자기비난으로 바뀐다. 비온은 생각이 감정을 소화하는 기능을 가질 수 있다고 보았지만, 임상에서는 때때로 그 반대도 목격된다. 생각이 감정을 만나는 통로가 아니라, 감정을 피하는 방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상담자는 종종 해석보다 다른 일을 하게 된다. 새로운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몸이 알고 있는 것을 함께 발견하는 일이다. "창피한 것이 아니라 무서웠군요."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상처받아서 슬펐군요." "답답한 것이 아니라 외로웠군요." 그 순간 몸에만 존재하던 경험은 감정의 이름을 얻는다. 비온의 표현대로라면 베타 요소가 알파화되는 순간이고, 라캉의 표현대로라면 실재계의 경험이 상징화되는 순간이다. 상담을 하며 점점 더 느끼게 되는 것은 사람의 고통이 생각의 부족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어떤 사람은 너무 많은 생각 때문에 힘들다. 생각은 공중에 떠다니지만, 감정은 몸에 남아 있다. 생각은 이미 이해했다고 말하는데, 몸은 여전히 두려워한다. 생각은 지나갔다고 말하는데, 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치유란 새로운 해석을 배우는 과정만은 아닐지 모른다. 때로는 이미 몸이 알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느껴지지 못했던 감정을 다시 만나는 과정이다. 두려움이 수치심의 가면을 벗고, 슬픔이 무기력의 옷을 벗고, 외로움이 자기비난의 언어를 내려놓는 순간. 사람은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있었는지 알게 된다. 그리고 그때, 생각은 처음으로 감정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이해하는 도구가 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