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포유
칼럼 포유
칼럼 포유

작은 깨달음 후 보이기 시작한 것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
작성일26-05-30 10:45 조회158회 댓글0건

본문

나는 오랫동안 마음공부를 해 왔다.


돌이켜보면 25년 가까운 시간이었다. 상담을 공부했고,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책을 읽었고, 수많은 내담자들의 삶을 만났다. 

박사 과정을 마쳤을 때는 이제 세상의 이치를 어느 정도는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내 마음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작업을 하면서 작은 깨달음 하나가 찾아왔다.


그리고 그 순간 또 하나의 자각이 생겼다.

내가 알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어쩌면 열다섯 살 아이가 "이제 다 컸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 깨달음 이후 특별한 일이 생긴 것은 아니다.

세상이 갑자기 달라진 것도 아니다.

그저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사람의 행동을 보았다면, 이제는 그 행동을 만들어내는 구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무례함 뒤에 있는 권력 관계가 보이고, 

누군가의 침묵 뒤에 있는 두려움이 보이고, 

관계 속에서 반복되는 역할이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내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억울한 일들도 다른 각도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그저 운이 나빴거나, 내가 부족해서 겪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니 그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편견과 권력, 사회적 구조가 작동한 결과인 경우도 있었다.


누군가는 나를 만나기도 전에 평가했고, 

누군가는 나를 제대로 알기도 전에 낮게 보았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불편했지만, 동시에 필요했다.

이해한다고 해서 부당함이 정당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신기한 것은 그 이후부터 비슷한 주제들이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어느 날 우연히 본 유튜브에서는 마치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내가 걸어온 길, 내가 겪었던 억울함, 아무도 사과하지 않는 현실, 

그리고 결국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정리해 가는 과정까지.


다음 날 본 드라마에서는 또 다른 방식으로 비슷한 이야기들이 펼쳐졌다.

비밀과 배신, 침묵과 상처.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작품에는 장미가 있었다.



돌이켜보면 장미는 오래전부터 내 삶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20대의 나는 장미 같았다.

외모는 어느 때보다 빛났지만 말에는 가시가 돋아 있었다.

그때는 그것이 내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가시는 누군가를 찌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해 존재했는지도 모른다.

아름다움과 상처, 기대와 경계심이 함께 존재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최근 한 내담자는 종결을 하며 노란 장미가 들어 있는 꽃다발을 건네주었다.

마침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그리고 그 아침에는 장미 농장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의 마지막 회를 보고 있었다.

하나하나 떼어 놓으면 우연이다.

하지만 마음은 그런 우연들을 가끔 하나의 이야기처럼 엮어 낸다.



융은 이것을 동시성이라고 불렀다.


원인과 결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내면의 상태와 외부의 사건이 묘하게 공명하는 경험.

나는 그것을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다만 어떤 시기에는 내 안의 중요한 주제가 여러 장소에서 반복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삶이 같은 내용을 여러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어떤 날은 사람을 통해,

어떤 날은 책을 통해,

어떤 날은 드라마를 통해,

어떤 날은 꽃 한 송이를 통해.



최근 나는 한 가지를 배우고 있다.

깨달음이란 모든 것을 알게 되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상태에 가깝다는 것을.


그래서 지금의 나는 답을 얻은 사람이라기보다 질문이 깊어진 사람에 더 가깝다.

세상을 다 안다고 생각했던 시절보다, 

세상이 얼마나 넓고 복잡한지 알게 된 지금이 오히려 더 겸손해졌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성장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작은 깨달음 하나가 찾아온 뒤, 

나는 더 많은 것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보기 시작했다.


그 풍경은 생각보다 훨씬 넓고 깊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로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