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nfant de tout le monde를 보고 나오며 가장 오래 남았던 것은 거대한 사건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굽은 어깨였고, 다시 올라가던 원피스 끈이었고,
바닷바람 속에서 함께 지르던 비명이었으며, 빨래줄에 하나씩 늘어나는 옷가지들이었다.
이 영화는 설명보다 감각으로 먼저 다가온다.
혼자 사는 남자의 집에는 낡은 인형 하나가 놓여 있다.
그는 소파에 앉을 때 인형의 어깨를 감싸 안고, 식탁 앞에도 마주 앉힌다.
처음에는 기이한 외로움처럼 보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은 너무 오래 혼자
살아온 사람이 관계의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붙들고 있던 마지막 습관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인형을 바느질하기 시작한다.
무표정하던 인형이 늘 웃는 입으로 바뀌었다. 이후 시장 곳곳에 메모지를 붙인다.
“아들 없는 아빠가 아빠 없는 아들을 찾는다.”
그 문장은 단순한 입양 광고가 아니다.
오랫동안 혼자 버텨온 사람이 처음으로 자기 결핍을 세상 밖으로 꺼내놓는 고백처럼 보인다.
그는 아이를 구하려 하지만, 어쩌면 동시에 자기 안의 버려진 아이 역시 함께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느 날 아이가 그 집에 들어온다.
남자는 익숙한 방식대로 아이의 어깨를 감싸려 하지만, 아이는 몸을 피한다.
대신 아이는 공을 튕긴다.
직접 안기는 대신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리듬을 맞추기 시작한다.
영화는 이 작은 장면 하나로 관계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 없이 보여준다.
가족은 갑자기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가능한 거리에서 천천히 리듬을 맞추는 일이라는 듯이.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인간을 선과 악으로 나누지 않는 데 있다.
손자가 츄르스를 먹고 싶다고 하자, 츄르스를 건네는 남성의 손톱에서 동성애를 연상하는 매니큐어를 본 순간,
할아버지는 츄르스를 받아들지 않은 채 아이를 데리고 떠난다.
사실 그 손자는 동네에서 외소증을 가진 여인과의 관계에서 태어난 할아버지의 아들이다.
사랑과 편견이 같은 사람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아이는 그 분위기를 그대로 흡수한다.
원래는 먹고 싶었던 그집 츄르스를 이제는 스스로 거부하게 된다.
아이는 논리보다 분위기로 세계를 배우기 때문이다.
이후 남주와 다시 그 가게를 찾았을 때, 상인은 할아버지가 이미 계산했다고 말한다.
그때 남주는 아이에게 억지로 먹으라고 하지 않는다.
대신 “그럼 내가 두 개 다 먹겠다”고 말하며 아이의 긴장을 풀어준다.
그 순간 아이는 비로소 자기 감각으로 다시 츄르스를 먹기 시작한다.
영화는 이 작은 장면 하나로 편견이 아이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과
관계가 그것을 어떻게 다시 풀어주는지를 보여준다.
게이 아들의 욕망을 끝내 이해하지 못했던 어머니 역시 그렇다.
그녀는 사회적 체면을 위해 아들을 결혼시킨다.
그 사람과 결혼한 여자의 어머니는 딸을 음식으로 통제하며, 불안을 미신으로 삼켜버린다.
토끼똥을 먹으며 딸을 지키려는 장면은 우스꽝스럽기보다 처절하다.
사랑하지만 불안하고, 지키고 싶지만 결국 억압하게 되는 부모의 모순이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어딘가 결핍되어 있다.
구부정한 어깨로 살아가는 남자,
억눌린 욕망 속에서 나비를 그리는 게이 남성,
몸의 경계를 오래 움켜쥐고 살아온 여자,
사회 주변부에서 아이를 키워온 레즈비언 공동체.
하지만 영화는 바로 그런 불완전한 사람들이 서로를 살게 만든다고 말한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몸의 언어였다.
사랑하지 않는 관계 속에서 여자는 내려간 어깨 끈을 다시 올린다.
그러나 충분한 교감 끝에 맺어진 관계에서 그녀는 더 이상 어깨 끈을 끌어올리지 않는다.
몸이 먼저 안전을 알아본 것이다.
또 어떤 순간에는 외로움이 극에 달한 남자가 소라껍질을 귀에 댄다.
그리고 소라껍질의 빛이 하늘의 별빛과 이어진다.
그 장면은 마치 인간의 간절한 기도가 보이지 않는 세계와 잠시 연결되는 동화 같았다.
우리는 보통 소원을 입 밖으로 말하지만, 이 영화는 침묵과 빛으로 소망을 표현한다.
마지막에 여러 사람이 서로를 끌어안으며 겹치는 장면 역시 오래 남는다.
그들은 정상적인 가족이 아니다.
완벽한 보호자도 아니다.
그러나 영화는 끝내 그들이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순간을 보여준다.
아마 이것이 이 영화가 진짜로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일 것이다.
인간은 완벽해서 서로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상처 입고 결핍된 채로도 누군가의 곁에 남으려 하기 때문에 서로를 살린다는 것.
그래서 “만인의 아이”라는 제목은 단순한 공동양육의 의미를 넘어선다.
한 아이는 모두의 손길 속에서 자라고,
한 사람의 삶 역시 수많은 타인의 흔적으로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