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성이 주는 나침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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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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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말 놀이에서 ‘문’이라는 단어를 받았을 때,
나는 그날 새벽 회색 벽 속 초록 문을 떠올렸다.
문을 열고 나가자 낮은 산과 소나무 사이,
머리카락처럼 길게 자란 풀이 손끝에 닿았다.
어린 시절 손으로 땋던 감각이
지금의 풍경 위로 이어졌다.
운동을 마친 아침, 주차장 옆 공원에서
잘려나간 풀의 자리를 찍었다.
호숫가 언덕, 넓적한 바위 위에 앉아
그 장면을 떠올리자 알림이 울렸다.
우연은 정확한 순간에 도착했다.
상담을 마치고 한 사람을 떠올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걸려오기도 했다.
융에게도 유명한 이야기가 하나 있다.
한 내담자가 꿈에서
황금 풍뎅이 모양의 보석을 선물 받는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바로 그때 상담실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창밖에는 실제 풍뎅이 한 마리가 와 있었다.
융은 서로 인과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사건이
의미 있게 겹쳐지는 현상을 ‘동시성’이라고 불렀다.
황금 풍뎅이가 융에게 동시성의 한 장면이었다면,
나에게는 그것이 하나의 오브제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때로는 말이다.
AI와 아무말 놀이를 하며 ‘드뷔시’를 이야기한 뒤
상담에서 내담자가 자신은 드뷔시를 듣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때로는 글자다.
라디오에서 방금 들은 단어가
바로 앞을 지나가는 택시의 이름에 적혀 있기도 했다.
때로는 풍경과 사람의 모습이다.
차창 밖으로 낮게 떠 있는 흰구름을 한참 바라보고
사진까지 찍었던 날,
상담실에 들어온 내담자가 하늘색 티셔츠에 흰색 가디건을 입고 있기도 했다.
때로는 아주 사소한 신체의 감각이기도 하다.
서로 연결될 이유가 없는 것들이
이상하리만큼 가까운 시간 안에서 겹쳐질 때가 있다.
처음에는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비슷한 경험이 반복되면서
나는 그 순간을 조금 더 오래 바라보게 되었다.
동시성은 반드시 어떤 답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잠깐, 여기 한번 바라봐.”
하고 나를 멈춰 세우는 것에 가까웠다.
내가 무엇인가를 생각했다고 해서
바깥에서 그것과 닮은 일이 반드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특별한 힘의 신호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다만 내면에서 일어난 일과
외부에서 일어난 일이 한순간 겹쳐질 때,
나는 평소라면 지나쳤을 장면 앞에서 잠시 멈추게 된다.
생각과 사건,
소리와 글자,
기억과 풍경,
내면과 사람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면서도
어느 순간 하나의 의미 안에서 만난다.
그때 나는 묻는다.
왜 하필 지금 이것이 겹쳤을까.
나는 왜 이것을 알아차렸을까.
이 장면은 내 안에서 무엇을 건드리고 있을까.
동시성의 의미는
그 답을 찾아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질문이 생기는 그 자리에서 잠시 머무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과거와 현재,
내면과 외부가 겹치는 자리에서
나는 서둘러 의미를 결정하지 않는다.
그저 멈춰서 바라본다.
그리고 조금 기다린다.
나침반은 목적지를 대신 정해주지 않는다.
내가 지금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조용히 확인하게 해줄 뿐이다.
동시성도 그런 것 같다.
그것은 내게 길을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잠시 멈춰 바라볼 곳을 알려준다.
작은 우연 하나가 마음에 걸리는 순간,
나는 그곳을 지나치지 않는다.
그 안에 반드시 정답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순간의 나와 바깥의 세계가
잠시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성은 나에게 나침반이 된다.
길을 대신 정해주는 나침반이 아니라,
내가 서 있는 자리와
내가 향하고 있는 방향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나침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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