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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의 순간, 주체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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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
작성일26-09-20 18:05 조회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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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어떤 의견을 말했을 때, 

이상하게 그 반대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사람이 있다.


상대가 A라고 하면 나는 B를 하고 싶어진다.

상대가 B라고 하면 나는 A를 선택하고 싶어진다.


흔히 이런 모습을 두고 ‘청개구리 심보’라고 한다.


하지만 조금 다르게 바라볼 수도 있다.


어쩌면 이것은 단순히 고집이 세거나 반항적인 성향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결정권을 지키는 방식이 ‘반대’로 굳어진 것​일 수 있다.


자신의 뜻을 충분히 말할 수 없었던 경험이 반복되면, 

어느 순간부터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보다 

‘상대가 원하는 것과 다르게 하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그때 반대는 선택이 된다.


하지만 여기에는 하나의 역설이 생긴다.


상대의 영향력을 거부하려고 할수록, 오히려 상대의 말이 내 행동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상대가 A라고 말했기 때문에 나는 B를 선택한다.

겉으로 보면 나는 상대의 뜻을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내 행동의 방향은 여전히 상대가 제시한 A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그렇다면 한 번 물어볼 필요가 있다.


“만약 이 사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나는 무엇을 했을까?”


이 질문은 반대의 이유를 따지는 질문이 아니다.


내 선택의 출처를 확인하는 질문이다.


상대가 A라고 말하기 전에도 내가 B를 원했다면, 나는 B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상대가 A라고 말한 뒤에야 B를 선택하고 싶어졌다면, 

내가 거부하고 있는 것은 A일 뿐 아니라 어쩌면 상대의 영향력 자체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반대하는 순간에도 나는 상대에게 묶여 있을 수 있다.


상대가 A라고 하면 B를 선택하고, 상대가 B라고 하면 A를 선택하는 

사람은 겉으로는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대의 말이 자신의 행동 방향을 결정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모습은 개인의 일상적인 관계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관계의 언어로 풀어야 할 문제를 구조의 언어로 풀면서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두 사람이 관계 안에서 조율해야 할 때, 본래 필요한 것은 

상대의 말을 듣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며 서로의 차이를 다루는 일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대화가


‘무엇이 옳은가’보다
‘누가 결정권을 갖는가’,
‘누가 우위에 있는가’,
‘누가 상대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가’의 문제가 되면 관계의 문제가 구조의 문제가 되어버린다.


그러면 상대의 말을 이해하거나 협의하기보다, 

상대의 영향력을 차단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된다.


반대하는 것이 곧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방법이 되고, 

동의하는 것은 상대에게 밀리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때도 같은 역설이 생긴다.


상대에게 지배당하지 않으려고 할수록, 

오히려 상대의 행동과 말에 나의 행동이 결정될 수 있다.


이것은 개인의 관계에서도, 여러 사람이 함께 움직이는 집단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구조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반대하지 않는 연습이 아니다.


선택하는 연습이다.


상대가 A라고 말했을 때 곧바로 B를 선택하는 대신 잠시 멈추는 것이다.


A를 선택할 수도 있다.
B를 선택할 수도 있다.
전혀 다른 C를 선택할 수도 있다.
지금은 결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상대의 의견을 듣는 것과 상대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은 다르다.


상대에게 영향을 받는 것과 상대에게 결정권을 넘기는 것도 다르다.


성숙한 자기결정권은 아무에게도 영향을 받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영향을 받은 뒤에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상태에 가깝다.


그래서 주체적인 사람은 반드시 반대하는 사람이 아니다.


필요하면 반대할 수 있고, 필요하면 동의할 수도 있다.


상대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수정할 수도 있으며,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반대로 할 자유가 주체성의 전부라면, 

나는 여전히 상대의 말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히려 더 성숙한 주체성은 이런 데 있을 것이다.


“네가 A라고 말했지만, 나는 잠시 생각해보고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겠다.”


그 선택이 A여도 괜찮고, B여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내가 반대했느냐가 아니라,
그 선택의 주체가 누구였느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개구리 심보를 줄이는 일은 반항적인 행동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어쩌면 오래된 하나의 신념을 내려놓는 일인지도 모른다.


“반대로 해야 내가 나일 수 있다.”


그 대신 새로운 경험을 쌓는 것이다.


“반대로 하지 않아도 나는 나일 수 있다.”


그때 비로소 반대는 여러 선택지 중 하나가 된다.


그리고 그 순간, 반대하지 않아도 주체적일 수 있는 자유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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