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감의 소비를 줄이자 생겨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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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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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바깥으로 향하는 감각을 조금 줄이고 싶어지는 때가 있다.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여러 장소를 오가고,
수많은 장면을 바라보는 동안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낀다.
세상은 끊임없이 오감을 자극하고, 우리는 그 자극을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오감의 소비를 줄이고 있다.
세상과 단절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오감을 빼앗긴 것도 아니다.
그저 내가 가진 감각을 바깥으로 계속 내보내 소비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평일에도 많은 것을 보고 듣는다.
상담을 하면서 내담자의 이야기를 듣고 표정과 몸짓을 바라본다. 청각과 시각은 분명 자극을 받는다.
하지만 상담에서의 감각은 일반적인 의미의 소비와는 조금 다르다.
내담자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움직임 하나가 내 안에 생각의 씨앗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것은 상담이 끝났다고 바로 사라지지 않는다.
어떤 말은 며칠 뒤 다시 떠오르고, 어떤 장면은 다른 경험과 연결되고,
어떤 질문은 전혀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그러니 나는 오감을 덜 사용하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오감으로 들어온 것을 함부로 소비하지 않는 쪽으로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상담에서는 오감을 소비하기보다 채집한다.
그리고 채집한 것들은 내 안에 오래 머문다.
냉장고 정리도 이와 비슷하다.
장을 볼 때마다 새로운 재료를 사다 보면 냉장고 안에 무엇이 있는지 잊어버리기도 한다.
이미 있는 재료를 또 사기도 하고,
새로 산 재료와 기존의 재료가 서로 어울리지 않아 요리에 사용하지 못한 채 다시 묵혀두기도 한다.
냉장고를 채우는 일은 계속되는데, 정작 안에 있는 재료는 줄어들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날 장보기를 멈추고 일정 기간 냉장고 안에 있는 재료부터 소비해보기로 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처음에는 남은 재료를 처리하는 일처럼 시작하지만, 의외의 일이 생긴다.
따로 있을 때는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재료들이 만나 새로운 요리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늘 해먹던 방식에서 조금 벗어나,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로 새로운 맛을 발견하게 된다.
냉장고를 비우려고 했는데,
오히려 이전에는 없던 요리가 태어나는 것이다.
생각도 그런 것 같다.
새로운 정보와 경험을 계속 받아들이면 내 안에 이미 들어와 있던 생각들이
충분히 소화되기도 전에 뒤로 밀려날 수 있다.
반대로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을 잠시 줄이면,
이미 내 안에 있던 경험과 감각과 생각들이 서로 만나기 시작한다.
그동안 따로 존재하던 생각이 다른 생각과 연결되고,
오래전에 경험했던 일이 지금의 경험과 만나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생각에도 숙성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최근 들어 알게 되었다.
처음 떠오른 생각은 때로 너무 날것이다.
감정도 선명하고, 판단도 빠르고, 하고 싶은 말도 많다.
그때 바로 꺼내놓으면 생각의 재료들이 각각의 맛을 그대로 드러낸다.
마치 익지 않은 음식처럼 정신에 자극을 줄 때도 있다.
마늘이나 생강처럼 향이 강한 재료는 익지 않은 상태에서는 장이 예민한 사람에게 자극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음식이 충분히 익고 숙성되면 처음의 날카로운 맛이 부드러워지고,
몸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느낌도 달라진다.
생각도 그런 것 같다.
처음 떠오른 생각은 너무 선명하고, 너무 뜨겁고,
너무 날카로워서 그대로 꺼내놓으면 내가 그 생각을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 채 쏟아내게 된다.
하지만 조금 두어보면 달라진다.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의 경험이 다른 경험과 연결되고,
감정과 생각이 서로 섞이고,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관계가 드러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생각의 날카로운 부분이 조금 누그러지고,
그 생각은 내 안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는다.
예전부터 익은 물김치의 알싸함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생각에도 그런 알싸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의 생각이 주는 자극적인 알싸함이 아니라,
오래 머물고 서로 섞인 뒤에 남는 알싸함이다.
그래서 이제는 생각이 떠오른다고 해서 반드시 바로 글로 만들지는 않는다.
어떤 생각은 그냥 둔다.
며칠 동안 다른 생각과 만나게 하고, 다른 경험 속에서 다시 바라보기도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문장 하나가 또렷해진다.
그때의 문장은 처음부터 잘 만들어진 문장이 아니다.
내 안에서 충분히 소화된 생각이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글이 숙성된다는 것은 문장이 잘 다듬어진다는 뜻만은 아닌 것 같다.
생각이 정신 안에서 소화된다는 뜻에 더 가깝다.
어쩌면 요즘 내가 바깥에 덜 나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다.
오늘이 일요일이라 집에 있는 것도 있지만,
평일에도 상담을 하면서 이미 충분히 많은 감각을 받아들이고 있다.
다만 그 감각을 바깥에서 계속 소비하지 않고,
내 안에 머물게 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보고 들은 것이 흩어지지 않고, 느낀 것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게 남아 있는 감각들이 생각의 재료가 되고, 생각은 시간을 만나면서 조금씩 익어간다.
새로운 것을 덜 받아들이는 것이 반드시 세상을 덜 사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충분히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냉장고 속 재료를 먼저 꺼내 먹다 보면 새로운 요리가 태어나듯이,
내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경험과 감각과 생각을 충분히 들여다보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생각이 태어나기도 한다.
오감의 소비를 줄인다는 것은 세상을 피해 들어가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바깥으로 향하던 감각을 잠시 내 안으로 거두어들이는 일일 수 있다.
새로운 것을 계속 가져오는 대신,
내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것을 오래 바라보는 시간.
그 시간 속에서 생각은 숙성되고,
숙성된 생각은 정신 안에서 소화된다.
그리고 잘 소화된 생각만이
어느 날 문장이 되어 밖으로 나온다.
알싸하지만 자극적이지 않고,
깊지만 무겁지 않은 맛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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