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성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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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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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깊은 사람은 반응이 느린 경우가 있다.
하나의 말이나 사건을 들었을 때 곧바로 반응하기보다,
그 안에 무엇이 더 있는지 살펴보고 자신의 경험과 연결해보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겉에서 보면 아무 반응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그 사람의 안에서는 여러 생각이 오가고 있을 수 있다.
반대로 반응이 빠른 사람은 자극을 받은 즉시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꺼내놓을 수 있다.
빠른 반응은 분명 필요한 순간이 있다.
하지만 너무 빨리 나온 생각은 아직 다른 경험이나 맥락과 충분히 만나지 않은 상태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느리면 깊고 빠르면 얕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반응의 속도와 생각의 깊이는 반드시 같은 축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빠르게 반응하면서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오래 생각하고도 처음 떠오른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속도의 우열이 아니라,
무엇을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를 아는 감각인지도 모른다.
된장이나 고추장, 간장처럼 시간이 지나야 깊어지는 맛이 있는가 하면,
막 무친 겉절이나 신선한 샐러드처럼 바로 먹어야 제맛인 것도 있다.
겉절이를 묵은지로 만들 필요도 없고, 묵은지를 겉절이처럼 먹을 수도 없다.
생각과 말도 그렇다.
어떤 것은 지금의 생생함이 필요하고, 어떤 것은 시간을 두어야 비로소 깊은 맛이 난다.
바로 꺼내야 할 말을 지나치게 오래 숙성시키면 생기를 잃을 수도 있고,
충분히 익어야 할 생각을 서둘러 꺼내면 깊이가 생기기 어렵다.
상담에서도 비슷한 순간을 만난다.
내담자의 감정에는 때로 즉각적인 반응이 필요하다.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을 놓치지 않고 함께 머물러야 하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담자의 한마디를 너무 빨리 해석하지 않아야 할 때도 있다.
그 말이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경험과 연결되어 있는지,
관계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조금 더 시간이 지나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담에서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다.
말을 들은 채로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시간이다.
처음에는 하나의 말이었던 것이 다른 경험과 만나고,
서로 떨어져 있던 생각들이 연결되면서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의미가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글을 쓰는 일도 그렇다.
처음 떠오른 생각을 바로 써야 할 때도 있지만,
어떤 생각은 한 번 꺼내놓고 잊어버린 듯 지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다 어느 날 다시 만났을 때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결이 생겨 있다.
글이 숙성된다는 것은 단순히 문장을 잘 다듬는다는 뜻만은 아닌 것 같다.
생각이 정신 안에서 소화된다는 뜻에 더 가깝다.
그래서 숙성된 생각은 처음 떠올랐을 때와 조금 다른 맛을 낸다.
바로 쏟아낸 말에는 생생함이 있지만,
한 번 깊어졌다가 나온 말에는 여러 경험을 지나온 사람만이 낼 수 있는 맛이 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다.
어떤 것은 신선할 때 가장 좋고, 어떤 것은 시간이 지나야 제맛을 낸다.
숙성의 미학은 무조건 느려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은 지금 꺼내고 무엇은 조금 더 안에 두어야 하는지를 구별하는 데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깊은 사람의 느린 반응은 생각이 없는 시간이 아니라, 생각이 너무 많은 시간일 수도 있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그 안에서는 이미 여러 재료가 서로 만나고 있을 수 있다.
마치 냉장고 안에 있던 재료들이 새로운 장을 만나 전혀 다른 요리가 되어 나오는 것처럼.
그러니 때로는 서둘러 결론을 내리지 않아도 된다.
조금 더 가지고 있어도 된다.
익어야 할 것은 익을 때까지.
그리고 지금 꺼내야 할 것은 신선할 때.
숙성은 느린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쓰임을 구별하는 감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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