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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것과 사랑할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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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
작성일26-09-22 07:51 조회1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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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평가절하는 공격성이라고 쉽게 생각하지만, 

이상화는 공격성이라고 생각하기 쉽지 않다.


누군가를 높이 평가하고, 특별하다고 말하고, 잘한다고 칭찬하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 사랑과 인정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격성은 반드시 상대를 낮추는 방식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를 지나치게 높여 특정한 자리에 묶어놓는 것 역시 공격성이 될 수 있다.


특히 그 높임이 존재 자체가 아니라 능력에 붙어 있을 때 그렇다.


아이에게 공부를 잘한다고, 똑똑하다고, 무엇이든 잘 해낸다고 반복해서 말하면 아이는 

자신의 능력뿐 아니라 자신의 존재 전체가 인정받는다고 느낄 수 있다.


능력을 칭찬했는데, 아이는 자신의 존재가 칭찬받았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 순간 능력과 자기가치가 붙기 시작한다.


잘하면 괜찮은 나이고, 잘하지 못하면 부족한 내가 된다. 

잘할 때는 특별한 사람이지만, 기대만큼 해내지 못하는 순간에는 

단순히 능력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가 떨어진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문제는 사람이 늘 잘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어떤 때는 잘할 수도 있고 어떤 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어느 단계까지는 뛰어난 능력을 보이지만 그 위로 치고 올라가는 힘은 부족할 수도 있다. 

어떤 영역에서는 앞서지만 다른 영역에서는 평범할 수도 있다.


그것은 능력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하지만 자기가치와 능력이 붙어 있는 사람에게는 

능력의 한계가 곧 자기 존재의 한계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의 한계가 드러나는 자리에 오래 머물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


새로운 곳으로 이동하면 아직 자신의 한계가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가능성이 있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다시 칭찬받고, 다시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곳에서도 현실의 능력 범위가 드러난다.


그러면 다시 실망하고, 자신을 평가절하하고, 또 다른 곳을 찾게 된다.


겉으로 보면 끊임없이 새로운 기회를 찾아가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는 어쩌면 다시 이상화될 수 있는 자리를 찾아다니는 것일 수도 있다.


이상화와 평가절하는 서로 다른 행동처럼 보이지만 한 축 위에 놓여 있을 수 있다.


한쪽에서는 상대를 지나치게 높이고, 다른 쪽에서는 지나치게 낮춘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보다 내가 정한 기준에 따라 상대의 가치를 결정한다.


그래서 이상화는 때로 평가절하의 반대가 아니라 평가절하가 시작되는 전제가 되기도 한다.


높이 올려놓았기 때문에 내려오는 순간의 낙차가 커진다.


여기에는 사랑의 문제도 놓여 있다.


누군가를 이상화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사랑한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맡고 있는 역할이나 내가 좋아하는 모습을 사랑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잘하는 사람, 특별한 사람, 나를 자랑스럽게 하는 사람, 기대에 부응하는 사람.


그 모습을 사랑하는 것은 분명 사랑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존재와 존재로 만나는 사랑은 조금 다르다.


상대가 잘할 때만이 아니라 잘하지 못할 때도, 

내가 좋아하는 모습뿐 아니라 내가 좋아하지 않는 모습이 드러날 때도 그 사람을 한 사람으로 만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상화하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방식이 제한된 사람일 수 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만나기보다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모습으로 상대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너라서 사랑해”가 아니라
“네가 이런 사람이어서 사랑해.”

그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관계에서는 매우 크다.


사람은 계속 변한다. 

잘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가능성이 크게 보이는 시기도 있고, 더 이상 올라가기 어려운 지점에 머무는 시기도 있다.


그때 사랑이 함께 내려오지 못한다면, 이상화는 쉽게 평가절하로 바뀔 수 있다.


그래서 아이를 칭찬할 때도 무엇을 어떻게 말하는지가 중요할 수 있다.


아이가 시험을 잘 봤을 때

“○○가 공부를 잘하니 엄마가 얼마나 기쁜지 몰라.”

라고 말하는 것과,


“네가 성적이 잘 나와서 기쁘구나. 네가 기뻐하니 엄마도 기분이 좋네.”

라고 말하는 것은 조금 다르다.


앞의 말에서는 아이의 성취와 부모의 기쁨이 바로 연결되지만, 뒤의 말에서는 

아이의 경험과 부모의 감정이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서로의 자리에 머물러 있다.


아이는 자신의 성취를 기뻐할 수 있고, 부모는 그 기쁨을 함께 기뻐할 수 있다.


아이의 성취가 부모의 행복을 책임지는 일이 되지 않으면서도, 기쁨은 충분히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연결되어 있지만 대신 살지 않는 것.


어쩌면 사랑도 그런 것인지 모른다.


상대를 내 기대에 맞는 모습으로 만들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곁에 있는 것.


사랑하는 것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다를 수 있다.


사랑한다고 느끼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모습을 향한 감정일 수도 있지만, 

사랑할 수 있는 역량은 상대를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 만나는 힘에 더 가까울 것이다.


사람은 늘 이길 수도 없고 늘 질 수도 없다.


잘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때 자신의 능력과 존재를 함께 평가하지 않는 것이다.


능력은 나의 일부이지, 나의 가치 전체가 아니다.


잘해서 가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잘할 때도 잘하지 못할 때도 여전히 존재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어쩌면 사랑도 그 자리에서 시작되는지 모른다.


높은 자리에 있는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높은 자리에서 내려온 상대와도 여전히 존재와 존재로 만날 수 있는 것.


그것이 사랑하는 것과 사랑할 수 있는 것 사이의 차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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