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르는 것과 시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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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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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은행나무를 보았다.
가로수들은 대부분 비슷한 색으로 물들고 있었는데,
유난히 노랗게 보이는 작은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가서 보니 이유가 있었다.
그 나무에는 다른 나무보다 유난히 많은 은행이 달려 있었다.
그런데 잎을 자세히 보니 자연스럽게 노랗게 물든 것이 아니었다.
잎이 적었고, 남아 있는 잎은 끝이 말라 있었다.
반면 은행이 달리지 않은 나무들은 잎이 짙고 싱그러웠다.
은행이 조금 달린 나무는 그보다 덜 선명했고,
유난히 많은 은행을 달고 있던 작은 나무는 눈에 띄게 시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시든 것은 약해서가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을 달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구나.
과수원의 나무를 생각해보면 조금 다르다.
과수원에서는 열매를 많이 맺는 것만이 좋은 일이 아니다.
주인은 나무의 상태를 살피고, 지나치게 많은 열매는 솎아내기도 한다.
열매를 키우는 일과 나무 자체를 살리는 일이 함께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가의 은행나무는 누가 그런 일을 해주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열매가 달렸는지, 이 작은 나무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지 살펴주는 사람도 없다.
그러니 나무는 열매를 계속 달고 있고, 어느 순간 자신의 몸을 유지할 에너지까지 열매를 키우는 데 내어주게 된다.
사람도 비슷하지 않을까.
사람은 살아가면서 자기 삶의 무게만 감당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책임, 기대까지 자신의 몫처럼 떠안게 되면 정작 자기 삶을 살아갈 힘이 남지 않을 수도 있다.
문제는 어린 사람일수록 내 것과 남의 것을 구분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가족의 어려움이 있으면 그것을 자기 책임처럼 받아들이기도 하고,
부모의 감정이나 형제의 문제를 자신이 돌봐야 할 일처럼 여기기도 한다.
이때 곁에 객관적인 시각을 가진 어른이 있다면 조금 다를 수 있다.
“그건 네 몫이 아니야.”
“여기까지는 네가 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다른 사람의 몫이야.”
“다른 사람을 돌보는 것과 네 삶을 돌보는 것은 함께 가야 해.”
그렇게 누군가가 적절한 때에 구분해주고 솎아준다면, 사람은 자기 삶을 유지하면서 관계를 맺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시선이 없다면 사람은 자신에게 무엇이 달려 있는지조차 모른 채 계속 많은 것을 짊어질 수 있다.
다른 사람의 감정도,
가족의 책임도,
주변의 기대도
자기 안에서 계속 키우게 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기 삶의 잎을 유지할 에너지가 부족해진다.
그래서 사람을 시들게 하는 것은 단순히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자기 몫과 남의 몫이 뒤섞인 채 살아가는 것 자체가 사람을 지치게 한다.
더 어려운 것은, 자신의 몫을 구분하려 할 때 그것을 다시 도덕적인 문제로 만드는 경우다.
가족이니까,
나이가 더 어리니까,
도움을 받았으니까,
그동안 누군가가 해주었으니까.
이런 말들은 관계의 맥락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기준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정말 구조를 말하려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몫을 함께 살펴야 한다.
누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누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누가 그 책임에서 빠져 있는지를 모두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특정한 사람에게만 책임을 집중하면서 구조나 도덕을 내세운다면,
구조를 보는 것이 아니라 구조를 이용해 누르는 것이 될 수 있다.
이런 일은 가족관계에서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조직이나 제도 안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규정과 기준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곧 객관적인 것은 아니다.
어떤 기준을 누구에게 어떻게 적용하는가에 따라 같은 기준도 질서를 만드는 기준이 될 수 있고,
한 사람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압력이 될 수도 있다.
특히 한 사람의 기준이 다른 사람의 삶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처럼 작동하기 시작하면,
사람은 자신의 행동뿐 아니라 자신의 사람됨까지 판단받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때 사람을 누르는 힘은 말 한마디보다 커진다.
자신의 몫을 말하는 것조차 잘못처럼 느껴지고,
도움을 거절하는 것조차 이기적인 행동처럼 여겨지고,
자신을 지키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무책임한 행동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면 사람은 자기 안에서조차 무엇이 자신의 몫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진다.
돌이켜보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을 대신 해결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무엇이 누구의 몫인지 함께 볼 수 있는 어른의 시선인지도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내가 책임질 것과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것,
나를 위한 것과 남을 위한 것을 구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시선.
그런 시선이 있어야 사람은 자기 삶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
은행나무를 보며 다시 생각한다.
열매를 많이 달았다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을 돌보는 것도 나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자기 몸을 유지할 힘까지 내어주면서 무엇인가를 계속 달고 있는 상태일 것이다.
내 삶의 무게도 만만치 않은데 다른 사람의 무게까지 떠안으면, 정작 내 삶을 살아갈 힘이 남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시든 사람을 보면서
“왜 이렇게 약하지?”라고 묻기보다
“무엇이 이 사람을 이렇게 눌렀을까?”
를 먼저 물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것은 정말 이 사람의 몫인가?”
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사람을 살리는 일은 더 많은 것을 해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달려 있는 것 가운데 무엇이 자기 몫이고 무엇이 남의 몫인지 함께 구분해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시든 것은 약해서가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을 달고 있었기 때문일 수 있다.
그리고 때로는
자기 몫이 아닌 무게에 눌려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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