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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쓰지 않고 나를 운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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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
작성일26-09-08 16:44 조회3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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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자기 삶이라는 도로 위를 달린다.


도로에는 수많은 차가 함께 달리고, 신호등이 켜지고 꺼지며, 예상하지 못한 장애물도 나타난다. 

다른 차가 갑자기 끼어들기도 하고, 내가 가고 싶은 방향과 다른 차의 방향이 겹치기도 한다. 

관계도 이와 비슷하다. 

나는 내 차를 운전하지만 다른 사람의 차까지 운전할 수는 없다.


한동안 나는 다른 차의 움직임에 너무 많은 신경을 쓰며 살았던 것 같다. 

저 차가 왜 저렇게 움직이는지, 내가 신호를 잘못 본 것은 아닌지,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살피느라 정작 내 차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는 놓치기도 했다.


그런데 내 자리를 찾고, 실제 관계 속에서 그 자리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달라졌다.


이제는 신호를 보되 신호에 끌려가지 않는다. 

다른 차를 보되 그 차의 핸들을 내가 잡으려고 하지 않는다. 

상대가 나에게 경적을 울린다고 해서 내가 잘못된 길에 들어섰다고 단정하지도 않는다.


나는 내 차선에서 내 차를 운전하면 된다.


‘내가 나를 운전한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현실치료에서 사용하는 자동차 비유가 떠올랐다.


현실치료에서는 인간의 행동을 자동차에 비유한다. 

자동차를 움직이는 엔진은 인간의 기본욕구이고, 내가 가고 싶은 방향을 정하는 핸들은 내가 원하는 것(want)​이다. 

그리고 앞바퀴는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뒷바퀴는 ​감정과 생리적 반응으로 설명한다.


이 비유가 흥미로운 것은, 삶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내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를 알고 핸들을 잡는 것이라는 점이다.


외부의 사건 자체가 나를 자동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사건을 어떻게 지각하고 무엇을 원하며 어떤 선택을 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은 늘 이런 도로 위에서 이루어진다.


누군가가 나를 비판했다.
누군가가 내 선택을 못마땅해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그 사건은 도로 위에 나타난 하나의 상황일 뿐이다. 

그것이 내 안으로 들어오면서 나는 그것을 나름의 방식으로 경험한다. 

같은 사건이라도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이는 이유다.


그런데 여기에서 나는 현실치료의 자동차 비유를 조금 다르게 바라보게 된다.


현실치료에서는 생각과 행동이라는 앞바퀴를 움직이면 감정과 생리라는 뒷바퀴도 따라 움직일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화가 나더라도 행동과 생각을 선택함으로써 감정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중요한 능력이다.


하지만 실제로 분노가 올라오는 순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꼭 앞바퀴에서 쉽게 조절되는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을 알아차리면 진정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의 말에 순간적으로 마음이 건드려진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몸에 힘이 들어간다.

화가 난다.
생각이 복잡해진다.
그러다 어느 순간 행동이 튀어나온다.


그렇다면 감정을 단순히 ‘따라오는 뒷바퀴’로만 볼 수 있을까?


나는 오히려 감정과 몸의 감각이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신호라고 생각한다.


‘왜 이렇게 화가 나지?’


그 감정을 밀어내기보다 잠시 들여다본다.


‘아, 나는 존중받고 싶었구나.’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시되었다고 느꼈구나.’


그제야 욕구의 좌절이 보인다.


그리고 욕구의 좌절을 알아차리면 생각이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고 내가 소리를 질러야 할까?’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이지?’
‘나는 어떻게 말하고 싶은가?’


그때 행동을 선택할 수 있다.


그래서 나에게 자기조절은 감정을 통제해서 행동을 선택하는 것이라기보다, 

감정과 몸의 감각을 알아차림으로써 행동을 선택할 수 있게 되는 것에 가깝다.


감정을 없애야 운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알아차리면 운전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다.


나는 지금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도 보고, 욕구도 보고, 생각도 보고, 행동하려는 나도 볼 수 있다.


운전대를 잡고 실제로 선택하고 행동하는 나는 ego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운전하는 나까지 포함하여 자동차의 움직임과 도로의 상황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가 있다. 

나는 그것을 Self라고 생각한다.


Self가 직접 운전하는 것은 아니다.


ego가 운전하고, Self는 운전하는 나까지 바라본다.


그러면 내가 나를 운전한다는 말도 조금 달라진다.


나는 감정을 뒷좌석에 밀어 넣고 앞만 보며 운전하는 사람이 아니다. 

내 안에서 어떤 감정이 일어나고 있는지, 몸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어떤 욕구가 좌절되었는지를 알아차리면서 핸들을 잡는다.


그리고 다른 차들의 움직임도 본다.


하지만 그들의 차를 운전하려 하지 않는다.


도로에는 계속 신호가 들어올 것이다. 

다른 차도 계속 나타날 것이다. 때로는 처음 보는 낯선 신호를 만나기도 할 것이다.


이제는 모든 신호를 미리 알고 있을 필요가 없다.


낯선 신호가 와도 내가 알아차릴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신호를 보고, 내 차의 상태를 느끼고, 필요한 만큼 속도를 조절하고, 다시 핸들을 잡는다.


그러니 이제는 예전처럼 애써 나를 통제하지 않아도 된다.


내 안을 알아차리면 된다.


감정을 느끼고, 감각을 알아차리고, 욕구를 발견하고, 그다음 내가 선택하면 된다.


어쩌면 내가 살아난다는 것은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 세상의 모든 차를 살피느라 용쓰지 않고,


내 차의 핸들을 내가 잡고 내 길을 가는 것.


용쓰지 않고 나를 운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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