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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고 있는 나는 누구의 눈으로 만들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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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
작성일26-09-09 20:16 조회2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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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신을 스스로 알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처음부터 자기 자신을 혼자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어린아이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의 눈을 통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배운다.


예쁘다는 말을 자주 들은 아이는 자신을 괜찮은 사람으로 느끼는 데 익숙해질 수 있고, 

반대로 충분히 괜찮은 모습이어도 그런 반영을 거의 받지 못한 아이는 

자신에 대한 좋은 평가를 쉽게 믿지 못할 수 있다.


상담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만날 때가 있다.


눈빛이나 태도가 단단해 보인다고 말하면


“제가 정말 그래요?”


하고 되묻는다.


자신의 좋은 모습을 이야기해주어도 쉽게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반면 어떤 사람은 특별히 뛰어난 것이 없어 보여도 자신에 대한 설명하기 어려운 자신감이 있다. 

자신을 괜찮은 사람으로 바라보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굳이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두 사람의 차이는 실제 모습의 차이만으로 설명되지 않을 때가 있다.


자신을 바라보았던 눈이 다르기 때문이다.


2013년 Dove가 진행한 「Real Beauty Sketches」라는 캠페인은 이 차이를 인상적인 방식으로 보여주었다.


여성들이 커튼 뒤에서 자신의 얼굴을 설명하면, 법의학 화가 길 자모라가 그 설명만으로 초상화를 그렸다. 

이후 같은 사람을 만났던 낯선 사람이 그 사람의 모습을 설명했고, 화가는 다시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두 그림을 나란히 놓자, 

자신이 설명한 모습보다 다른 사람이 설명한 모습이 더 아름답고 긍정적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 장면이 흥미로운 것은 단순히 사람들이 자신의 외모를 과소평가한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사람은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얼굴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얼굴을 바라보았던 부모의 표정,
어릴 때 들었던 말,
비교당했던 경험,
실수했을 때 돌아오던 반응까지 함께 보고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나는 실제의 나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닐 수 있다.


나를 바라보았던 사람들의 눈이 내 안에 남아, 

어느 순간 그것이 내가 나를 바라보는 눈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보다 기대에 맞는 모습을 요구받았던 사람은 

‘그냥 나로 있어도 괜찮다’는 감각보다 ‘무언가를 잘해야 안전하다’는 감각을 먼저 배울 수 있다.


현실적인 언어를 조금 서툴게 사용하는 사람에게 가까운 사람이 

“사회생활을 하면 호구가 될 거야”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 말의 밑바닥에는 이용당할까 봐 걱정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걱정하는 마음과 전달된 언어는 다르다.


상대가 반복해서 듣는 말이


“너는 세상을 잘 모른다.”
“너는 부족하다.”
“너는 이용당할 사람이다.”


라는 메시지로 남는다면, 어느 순간 그 말은 타인의 평가가 아니라 자신의 자기소개가 될 수도 있다.


현실의 언어가 서툰 것과 사회생활을 못하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고, 

순진한 것과 호구가 되는 것도 같은 말이 아니다.


그럼에도 가까운 사람의 시선은 오래 반복될수록 자기표상 안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잘 본다는 것은 단순히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일인지도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나와 실제의 나 사이에 어떤 시선들이 들어와 있는지 살펴보는 것.

한때 나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지금의 나를 너무 작게 담고 있는 자기표상이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이 건네는 새로운 시선을 무조건 믿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알지 못했던 나의 모습을 누군가가 발견해주었을 때 그것을 너무 빨리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정말요?”

에서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네요.”


그리고 어느 순간

“생각해보니 나에게도 그런 면이 있었구나.”


까지 가보는 것.


어쩌면 자기표상을 바꾼다는 것은 새로운 사람이 되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접혀 있던 나를 조금씩 펴는 일일 수 있다.


내가 알고 있는 나는 어쩌면 실제의 나보다 작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작은 나는 내가 만든 것만이 아닐 수도 있다.


나를 바라보았던 눈들이 내 안에 남아 만들어 놓은 나일 수도 있다.


그러니 가끔은 내가 알고 있는 나를 잠시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나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 사람이 나를 정확히 보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아직 보지 못한 나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다.


내가 알고 있는 나는,


과연 누구의 눈으로 만들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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