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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의 시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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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
작성일26-09-11 14:14 조회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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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인의 소설 《가시고기》에는 아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아버지가 나온다. 

가시고기 수컷이 새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에 빗대어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과 헌신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자녀가 어릴 때 부모가 자신을 내어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이는 혼자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씻는 것부터 생활습관을 익히는 것까지 부모의 돌봄은 아이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면 돌봄의 방식도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부모가 모든 것을 대신해주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자신의 몫을 갖게 하는 것이다.


어린아이도 가족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자기 방을 정리하고, 식탁을 닦고, 빨래를 개고, 조금 더 자라면 집 주변의 일을 맡을 수도 있다. 

외국 영화를 보면 어린아이에게 잔디를 깎는 일을 맡기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다.


그것은 아이에게 고생을 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참여시키는 일일 것이다.


가족 안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가 모든 것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을 나누어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을 한 사람이 계속 대신하면 결국 누군가는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희생해야 한다. 

반대로 각자가 자기 몫을 조금씩 담당하면 희생은 분담으로 바뀐다.


이런 경험은 자녀에게도 필요하다.


‘나는 이 가족의 구성원이고, 내가 할 몫이 있다.’


이 감각은 책임감으로 이어지고, 내가 생활에 기여하고 있다는 느낌도 갖게 한다. 

삶에서 필요한 기본적인 일들을 직접 해보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부모가 자녀가 할 수 있는 일까지 계속 대신해준다면 어떻게 될까.


직장생활을 하거나 공부를 한다는 이유로 밥을 차려주고, 빨래를 해주고, 방을 정리하고,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계속 챙겨준다면 자녀는 편할 수 있다.


하지만 편안함과 성장에 필요한 경험은 같지 않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빨래를 하고, 밥을 챙겨 먹고, 집을 정리하고, 필요한 물건을 사고, 

생활비를 관리하는 일은 단순한 집안일이 아니다. 

자기 삶을 운영하는 능력을 배우는 과정이다.


언젠가 자녀가 자신의 짝을 만나 함께 살아가게 된다면 더욱 그렇다. 

두 사람이 함께 생활하려면 직장생활만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일을 할 줄 알아야 하고, 서로의 상황에 따라 자신의 몫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부모가 그동안 대신해준 몫을 어느 날 갑자기 배우자가 떠안게 된다면 또 다른 갈등이 생길 수도 있다.


그래서 ‘내가 너무 힘들었으니 너는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부모의 마음도 한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다.


부모 세대가 일과 육아, 살림을 모두 감당하며 힘들게 살아왔다면 자녀에게는 그런 고생을 시키고 싶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힘든 경험을 모두 없애주는 것과 자녀가 감당할 수 있는 삶의 몫을 덜어주는 것은 다르다.


적절한 집안일은 고생시키는 일이 아니라 삶을 배우는 일일 수 있다.


물론 자녀가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 되어 학업이나 직장생활로 정말 힘든 시기라면 부모가 도울 수도 있다. 

성인이 된 뒤에도 자녀가 도움을 요청하면 부모가 자신의 여건 안에서 도와줄 수 있다.


부탁하면 들어줄 수도 있고, 여건이 되지 않으면 들어주지 않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부모가 필요하지 않은 돌봄까지 계속 주도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해줄게”에서
“필요하면 말해”로.


돌봄의 주도권을 조금씩 자녀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그런데 부모가 자녀가 독립한 뒤에도 자신의 익숙한 방식대로 계속 돌보고 희생한다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부모는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내가 좋아서 하는 거야.”
“자식에게 해주는 게 행복해.”


하지만 내가 좋아서 하는 행동과 자녀에게 필요한 행동은 언제나 같은 것은 아니다.


더구나 자신이 자녀를 위해 자신의 삶을 뒤로하고 희생했다고 느끼게 되면, 

그 희생이 훗날 자녀에게 보상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나는 너를 위해 이렇게까지 했는데, 너도 나를 위해 어느 정도는 그래야 하지 않을까.’


이 마음은 부모가 직접 말하지 않아도 자녀에게 전달될 수 있다.


그러면 자녀는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가면서도 부모에게 미안함을 느낄 수 있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자신의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내어주었는데, 

자녀는 자신의 터전을 만들고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는 데 돈과 시간을 쓰고 있으니 서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녀가 부모의 희생을 보상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자녀에게 필요한 것은 부모의 희생을 갚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살아갈 자유일 것이다.


그래서 부모가 자녀에게 충분히 해주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어느 때부터 자신의 것을 다시 자신의 삶으로 가져오는가인지도 모른다.


자녀가 독립한다는 것은 자녀만 부모에게서 독립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 역시 자녀를 돌보던 자신의 습관과 역할에서 조금씩 독립해야 한다.


자녀에게 쏟던 시간과 에너지, 관심과 돈을 다시 자신의 삶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그것은 자녀를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녀에게 자기 삶의 몫을 돌려주는 일일 수 있다.


돌봄에도 시간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어릴 때는 충분히 돌보고,
자라면서는 함께 참여하게 하고,
스스로 할 수 있게 되면 자기 몫을 돌려주고,
독립하면 필요한 때 도움을 주는 관계로 바뀌는 것.


돌봄의 목적은 아이가 영원히 돌봄을 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자기 자신을 돌보고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일 테니까.


부모가 계속 대신해준다면 자녀는 생활에 필요한 것을 배울 기회를 잃을 수도 있고, 

부모는 자신의 희생을 크게 느끼게 될 수도 있다.


그러면 부모가 사랑으로 내어준 것이 자녀에게는 갚아야 할 희생의 빚으로 남을 수도 있다.


반대로 각자가 자기 몫을 살아간다면 관계는 희생이 아니라 분담이 된다.


부모는 자신의 삶을 살고, 자녀도 자신의 삶을 산다.


필요할 때 서로 손을 내밀고, 할 수 있는 만큼 서로 돕는다.


어쩌면 자녀를 사랑한다는 것은 끝까지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품어야 할 때 충분히 품고, 놓아야 할 때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야 자녀도 부모의 사랑은 기억하면서, 

부모의 희생까지 자신의 삶에 짊어지지 않고 자기 삶을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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