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자의 자리에서 판단자의 자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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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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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관계나 조직 안에 있을 때 사람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질문은 대개 이것이다.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나는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생존자의 시선이다.
생존자의 시선에서는 상대의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는 것보다,
그 행동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먼저 살핀다.
상대가 나를 어떻게 판단할지, 무엇을 해야 상황이 더 나빠지지 않을지,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돌아본다.
그것은 판단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 순간에는 판단보다 생존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존자는 때때로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에서도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려 한다.
‘저 사람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겠지.’
‘조직도 어쩔 수 없었겠지.’
‘내가 뭔가 부족했던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은 반드시 진실이어서가 아니다.
때로는 그 환경을 견디기 위해 필요한 생각이기도 하다.
그런데 생존해보지 않은 사람의 눈으로 그 상황을 바라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사람은 사건 밖에 있기 때문에 상대의 행동을 비교적 쉽게 판단할 수 있다.
‘왜 그때 그렇게 했을까?’
‘왜 말하지 않았을까?’
‘왜 저항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생존자의 입장에서는 그때가 그렇게 단순한 선택의 상황이 아니었을 수 있다.
말했을 때 감당해야 할 것이 있었고, 저항했을 때 잃게 될 것이 있었으며,
침묵하는 것이 당시에는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수도 있다.
따라서 생존자의 행동만 보고 그 행동을 판단하면, 그 행동을 만들어낸 상황의 압력은 사라진다.
생존자는 자신이 무엇을 선택했는지만이 아니라,
그 선택을 하면서 무엇을 감당했는지까지 함께 이해받기를 원할 수 있다.
어쩌면 억울함은 여기에서 생기는지도 모른다.
‘내가 한 행동이 왜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는가.’
그때의 자신에게 어떤 선택지가 있었는지 아무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번은 사건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고,
또 한 번은 사건이 끝난 뒤 자신의 행동을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상황을 벗어나고, 다시 살아가게 되면 질문이 달라진다.
‘나는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에서
‘그들은 과연 옳게 행동했는가?’로.
그때 비로소 생존자는 판단자의 자리로 이동한다.
판단자는 이미 그 상황을 지나온 사람이다.
그러므로 사건을 자기 바깥에 놓고 바라볼 수 있다.
생존자가 사건 안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묻는 사람이라면,
판단자는 사건 밖에서
‘무엇이 옳았는가’를 묻는 사람이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이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판단자의 자리가 더 높은 것이다.
사람으로서 누가 더 우월하다는 뜻은 아니다.
상황을 바라볼 수 있는 거리가 생겼다는 뜻이다.
폭풍 속에 있는 사람은 바람을 견디느라 바쁘다.
폭풍을 빠져나온 사람은 비로소 그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왔고 무엇을 쓰러뜨렸는지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볼 것이 있다.
처음부터 폭풍 밖에 있던 사람은 과연 폭풍을 빠져나온 사람과 같은 판단을 할 수 있을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사건 밖에 있다는 것은 판단할 수 있는 거리를 갖고 있다는 뜻이지만,
그 사건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너무 가까이 있는 사람은 상황에 매여 판단하기 어렵고,
너무 멀리 있는 사람은 그 안에서 감당했던 압력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생존자의 경험을 모르는 판단은 때때로 생존자에게 또 다른 억울함을 남긴다.
‘왜 그렇게 했느냐’를 묻기는 쉽지만,
‘그때 그 사람에게는 어떤 선택지가 있었는가’를 묻는 것은 다르다.
생존을 통과한 사람은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자신도 한때 선택할 수 없는 자리에서 선택해야 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판단자의 자리에 선다는 것은 단순히 남을 평가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다.
사건을 조금 더 멀리서 보면서도, 그 안에 있던 사람의 자리를 잃지 않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는 자신의 잘못도 볼 수 있다.
‘내가 잘못한 부분은 무엇이었을까.’
그러면서 동시에 타인의 잘못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나에게 한 방식까지 정당해지는 것은 아닐까.’
이 둘을 함께 볼 수 있게 되는 순간, 사건은 조금씩 제자리로 돌아온다.
누군가에게 상처받은 사람이 자신의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돌려줄 수도 있다.
그 마음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해와 정당화는 다르다.
자신이 가진 힘으로 약한 사람을 밀어내는 것은 비열함일 수 있고,
그것이 잘못임을 알면서도 힘 있는 사람에게 맞서지 못하고 침묵하는 것은 비겁함일 수 있다.
두려움은 비겁함을 설명할 수 있지만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과거 상처는 현재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지만, 타인을 해칠 권리를 주지는 않는다.
그리고 생존자의 과거 행동 역시 마찬가지다.
그때의 행동에 아쉬운 부분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행동을 만들어낸 두려움과 압력, 관계의 위계와 당시의 선택 가능성까지
함께 보지 않은 채 그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다.
행동은 판단할 수 있지만, 그 행동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자리까지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생존자의 자리에서는 이런 구분을 충분히 하기 어렵다.
그때는 그저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아난 뒤에는 다르다.
이제는 자기 몫과 타인의 몫을 나눌 수 있다.
내가 잘못한 것은 내가 책임지되,
다른 사람이 한 일까지 내 책임으로 가져오지 않을 수 있다.
그때는 거대한 권위처럼 보였던 사람과 조직도 이제는 하나의 행동하는 주체로 보인다.
그리고 묻게 된다.
‘그들은 과연 옳게 행동했는가?’
이 질문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그 사건을 다시 붙잡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 있다.
더 이상 그들의 판단만 받을 필요가 없어졌다는 뜻이다.
이제 나도 그때의 일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때 비로소 알게 된다.
그때 내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를.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볼 수 있지만,
내가 잘못하지 않은 것까지 더 이상 책임지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생존자는 살아남기 위해 상대를 살핀다.
판단자는 살아난 뒤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러나 진정한 판단자의 자리는 단순히 사건 밖에 있는 자리가 아니다.
살아남은 사람의 경험과 사건을 바라볼 수 있는 거리가 함께 있는 자리다.
어쩌면 회복의 한 모습은
피해의 자리에서 벗어나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나를 살려낸 뒤,
이제는 그때의 일을 내가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생존자의 자리에서 판단자의 자리로.
그 사이에
비로소 나의 삶이 다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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