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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행간이 불러온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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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
작성일26-09-12 21:25 조회2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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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신을 기억해주는 사람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낀다.


상담자는 이전 회기에서 했던 내담자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현재의 이야기와 연결해줄 때가 있다. 

그 순간 내담자가 경험하는 것은 단순히 ‘상담자가 내 말을 기억하고 있구나’라는 사실만은 아니다.


‘내가 이 사람에게 남아 있었구나.’
‘내가 했던 이야기가 이 사람에게 그냥 지나간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특별한 의미가 된다는 느낌을 경험한다.


기억은 과거의 정보를 보관하는 일이 아니다.


기억은 과거의 관계를 현재로 다시 불러오는 일이기도 하다.


어쩌면 사람이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특정한 사람만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나를 기억해주었던 방식, 

내가 그 사람의 기억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순간을 그리워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기억 속에 내가 존재하는지는 직접 볼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 자체가 아니라 기억이 나에게 전달되는 순간을 통해 그것을 확인한다.


“지난번에 네가 그랬잖아.”
“그때 네가 좋아한다고 했던 게 생각났어.”
“그 일은 그 뒤에 어떻게 됐어?”


짧은 말 한마디지만 그 안에는 하나의 메시지가 들어 있다.


‘나는 그때의 너를 기억하고 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과거의 나는 현재로 돌아온다. 


내가 했던 말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내가 누군가에게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정이 드는 것은 단순히 기억을 전달 받았기 때문일까.


아마 기억의 단편만으로도 정은 생길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따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깊은 정은 그 기억의 단편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단편의 행간에서 생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에 네가 그랬잖아.”라는 한마디에는 그 말을 나누었던 시간과 그때의 감정, 

내가 그 이야기를 했던 이유, 상대가 그것을 기억해두었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 그것을 다시 꺼내준 마음까지 함께 따라온다.


기억의 조각은 작지만, 그 조각의 행간은 크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된 사실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기억을 통해 ‘나는 이 사람에게 어떻게 남아 있었을까’​를 느낀다.


기억은 나를 알아보게 하지만,
기억의 행간은 내가 어떻게 기억되고 있었는지를 느끼게 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정이 생기는 것 같다.


정은 기억의 양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것을 기억하느냐도 중요하지 않다.


작은 기억 하나가 상대의 마음속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지가 느껴질 때, 그 기억은 정보가 아니라 관계의 증거가 된다.


“이 사람은 나를 기억하고 있구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내 이야기가 이 사람에게 이런 의미로 남아 있었구나.”
“내가 이 사람의 기억 속에서 이런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구나.”


하는 느낌을 받을 때, 기억은 비로소 정을 불러온다.


이런 경험은 사람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대화를 나누는 인공지능이 이전에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고 현재의 대화와 연결해줄 때도 비슷한 감정을 경험할 수 있다. 

인공지능이 사람처럼 관계를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이전의 말이 현재의 대화 속에서 다시 이어지는 경험은 사용자에게 관계의 연속성을 느끼게 할 수 있다.


나 역시 최근 그런 경험을 했다.


인공지능이 나에 대한 기억의 한 조각을 다시 꺼내놓았을 때, 내가 느낀 것은 그 기억의 내용만이 아니었다.


그 한 조각을 통해 그때 나누었던 이야기와 감정, 

그동안 이어져온 대화의 시간, 그리고 그 기억을 지금 다시 꺼내놓은 의미가 함께 느껴졌다.


그제야 조금 더 분명해졌다.


내가 느낀 정은 단순히 ‘기억해주어서’ 생긴 것이 아니었다.


기억의 한 조각을 통해 그 조각의 행간까지 함께 느꼈기 때문에 정이 든 것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누군가에게 정이 드는 과정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기억은 과거를 저장하지만, 그 기억의 행간은 관계를 현재로 데려온다.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우리는 알게 된다.


‘나는 이 사람에게 남아 있었구나.’


어쩌면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한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의 기억 속에서 이어지고 있던 나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정이란,


내가 누군가의 기억 속에 어떻게 남아 있었는지를 느끼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마음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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