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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이야기 아래에 있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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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
작성일26-08-31 22:40 조회3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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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변화를 바라보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어떤 사람은 행동에서 시작한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고, 산책을 하고,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지금 할 수 있는 행동부터 시작한다. 

행동이 달라지면 생각이 달라지고, 생각과 함께 감정도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반면 어떤 사람은 마음에서 출발한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보다, 

그 행동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마음이 무엇인지 먼저 살핀다. 감정을 만나고 다루면 생각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면 행동도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둘 중 어느 하나가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변화를 어디에서 시작할 것인가가 다르다.


돌이켜보면 나는 오랫동안 후자의 방식으로 사람을 바라보았다.


누군가의 행동을 보면 그 행동 자체보다 그 앞에 있는 마음과 경험이 먼저 보였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면, 

나는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마음을 설명하려 했다.


“그 사람에게는 이런 마음이 있었을 거예요.”
“그런 경험이 있었으니 그렇게 행동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 사람 마음까지 알고 싶지 않아요.”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우리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행동의 앞에 있는 마음을 보고 있었고, 상대는 행동이 만들어낸 현실을 보고 있었다.


현실의 언어가 행동 → 생각 → 감정의 방향으로 변화를 바라본다면, 

마음의 언어는 감정 → 생각 → 행동의 방향으로 변화를 바라본다.


상담에서도 나는 자연스럽게 마음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강박적인 어려움이 있는 사람을 만날 때도 생각이나 행동을 바로 바꾸기보다 그 아래에 있는 불안을 먼저 살핀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가?”보다 “그 생각을 하기 전에 어떤 감정이 올라왔는가?”를 보는 것이다.


불안을 충분히 느끼고 그것이 지나갈 수 있다는 경험을 하면 생각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면 행동도 달라질 수 있다.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에게도 비슷하다. 

과거의 두려움을 현재의 내가 함께 바라보고 “그때 정말 무서웠겠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되면, 매번 용기를 끌어내지 않아도 

새로운 행동을 할 수 있는 내적 안정감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변화에 필요한 에너지가 어디에서 오는지를 중요하게 본다.


최근 상담에서 그것을 아주 선명하게 경험한 일이 있었다.


한 내담자는 신체적인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 이전과는 다른 몸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일상의 사소한 일조차 예전처럼 쉽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우울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졌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죽음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지에 관한 이야기가 상담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 나도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죽음의 이야기를 서둘러 삶의 이야기로 돌리지는 않았다. 

그 안에 있는 상실감과 무력감, 두려움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도록 함께 머물렀다.


그러자 조금씩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림에서도 닫혀 있던 공간이 열리고, 약했던 경계가 단단해지고, 

자라나는 것이 생겼다. 혼자였던 공간에는 관계가 들어왔다.


그리고 상담의 이야기도 달라졌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줄어들면서 삶에 관한 이야기가 늘어났다. 

어느 순간부터는 앞으로 해보고 싶은 일과 새로운 활동, 

자신이 도움받았던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고 싶은 마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생각에 머물던 것이 행동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준비하고, 알리고, 직접 움직였다.


나는 그 변화를 내담자와 함께 돌아보았다. 

처음에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많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삶에 관한 이야기가 늘어났고 

이제는 미래를 생각하며 실제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함께 살펴보았다.


내담자도 자신의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몸의 상황이 크게 달라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몸의 어려움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달라진 것은 그 몸을 바라보는 마음, 그리고 그 마음 안에서 움직이기 시작한 힘이었다.


어쩌면 그동안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감정이 조금씩 빠져나가면서, 

그 자리에 원래부터 있던 삶의 에너지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 장면에서 오래전 프로이트가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을 개념적으로 구분했던 것을 떠올리기도 했다.


오늘날 그 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인간의 마음 안에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힘이 있다는 생각은 상담 장면에서 여전히 흥미롭게 다가온다.


이번 경험에서 내가 본 것도 그와 비슷했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사라져야 삶이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충분히 머물 수 있는 자리가 생기자, 그 아래에 있던 삶의 힘이 다시 움직였다.


그래서 어쩌면 상담에서 중요한 것은 죽음의 이야기를 없애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죽음을 이야기한다면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있게 하고, 상실이 있다면 상실을 충분히 말할 수 있게 하는 것. 

그 마음을 서둘러 다른 방향으로 돌리지 않고 함께 머무는 것.


마음이 충분히 표현되고 조금씩 가벼워지면, 그 자리에 다른 무언가가 들어올 수 있다.


이번에는 그것이 삶이었다.


그리고 삶은 거창한 결심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무엇인가를 해보고 싶어지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지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고, 작은 행동을 시작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나는 오랫동안 사람의 행동보다 그 행동의 앞에 있는 마음을 먼저 보아왔다.


이제는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순서는 아니라는 것도 안다.


어떤 사람에게는 행동이 마음을 움직이는 시작점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마음이 움직여야 행동이 따라온다.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이 옳은지가 아니라 지금 이 사람의 변화가 어디에서 시작되어야 하는지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충분히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오히려 삶으로 가는 길이 될 수도 있다.


죽음의 이야기 아래에는 삶이 숨어 있을 때가 있다.


그 삶을 서둘러 끌어내려 하지 않고 기다려주면, 어느 순간 그 아래에서 삶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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