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포유
칼럼 포유
칼럼 포유

그림은 아직 그대로 있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
작성일26-09-03 11:23 조회30회 댓글0건

본문


오랜만에 꿈에 엄마가 나왔다.


꿈속의 엄마는 내가 기억하는 모습과 달랐다. 

베레모를 쓰고 연한 노란색과 초록색의 밝은 옷을 입은 채, 

두 명의 여자와 함께 거리를 걷고 있었다. 마치 화가처럼 보였다.


엄마를 만나자 반가운 마음에 물었다.


“지난 작품은 어떻게 했어?”


엄마가 대답했다.


“6점 그대로 있다.”


잠에서 깬 뒤에도 그 말이 오래 남았다.


어린 시절 나는 화가가 되고 싶었다. 

그림을 좋아했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는 반대했다. 너무 어린 나는 내 뜻을 끝까지 주장할 수 없었고, 

그렇게 그리고 싶었던 마음은 삶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림은 정말 사라졌던 것일까.


돌이켜보면 그림은 다른 모습으로 내 삶에 남아 있었다.


상담센터의 리플릿에는 연한 노란색과 초록색이 들어가 있고, 상담실의 소파도 초록색이다. 

벽에는 노란 나비들이 있다. 꿈속 엄마의 옷과 닮은 색이다.


어린 시절 기억 속 엄마에게도 노란색과 초록색이 있었다. 

엄마가 입었던 노란 스카프와 초록색 재킷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어쩌면 우리는 부모의 말을 기억하는 것만이 아니라 부모의 색도 기억하는지도 모른다.


무엇을 좋아했는지, 무엇을 싫어했는지, 무엇을 허락했고 무엇을 허락하지 않았는지. 

그런 것들은 말보다 더 깊은 곳에 남아 내가 살아가는 방식과 선택의 색이 되기도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묻게 된다.


이것은 정말 내 것인가.


아니면 부모에게서 받은 것인가.


이번 꿈에서 엄마는 달랐다.


그림을 반대하던 엄마가 아니라 자신의 작품을 가진 화가처럼 나타났다. 

밝고 편안한 얼굴로 자신의 작품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눈물이 났다.


이제 나는 누구의 허락도 없이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릴 수 있다. 

그런데도 꿈속에서 엄마가 화가가 되어 나타난 것만으로 눈물이 나는 것은, 

내 안의 어린 내가 오래도록 어떤 허락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최근 나는 몇 년 전의 한 사건에서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분노를 비로소 꺼내놓았다.


그러고 나니 마치 오래 막혀 있던 통로의 마개 하나가 빠져나간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자리에 들어온 것은 뜻밖에도 분노와 반대편에 있던 것이 아니었다.


오래전 내가 원했던 것이었다.


그림이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어린 나였다.


어쩌면 그때 표현하지 못했던 분노와, 포기해야 했던 그림은 같은 곳에 눌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싫다’고 말하지 못했기에 ‘하고 싶다’는 마음도 함께 접어두었던 것이다.


그래서 분노가 빠져나가자 그림이 돌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부모의 말과 신념은 자녀의 삶에 오래 남는다.


하지만 부모에게서 받은 것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그중 무엇이 부모의 것이고, 무엇이 원래부터 내 것이었는지를 다시 구별해야 한다.


엄마에게서 기억한 노란색과 초록색은 이제 엄마의 색이면서 나의 색이 되었다.


어린 시절 허락받지 못했던 그림도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내 삶에 남아 있었다.


어쩌면 나는 엄마의 색을 붙잡고 있었던 동시에, 그 색으로 내 삶을 다시 그리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꿈속에서 엄마는 말했다.


“6점 그대로 있다.”


그 말을 다시 생각한다.


사라진 줄 알았던 것은 어쩌면 사라진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 그대로 남아 있다가, 내가 다시 그것을 바라볼 수 있을 때 돌아오는 것.


그림은 아직 그대로 있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그 그림 앞에 앉을 차례인지도 모른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로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