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들어갈 자리가 생긴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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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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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부터 한 사건과 관련된 마음의 작업을 해왔다.
처음 그 사건을 이야기할 때 나는 그 대상을 ‘그 사람’이라고 불렀다.
상담사에게조차 그 사람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내가 그 여자를 보호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니 꼭 그 여자를 보호했던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사건이 터졌을 때 내 안에서 가장 먼저 올라온 것은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니 사건 자체를 작게 만들어야 했다.
내가 잘못한 부분을 크게 보고, 사건에서 내가 느낀 억울함과 분노, 수치심은 축소했다.
그러니 상대방을 굳이 특정할 필요도 없었다.
‘그 사람’이면 충분했다.
올초부터 그 사건을 조금씩 작업하면서 처음에는 억압되어 있던 감정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억울함도 만나고, 분노도 만나고, 수치심도 만났다.
상담사가 어느 순간 “이름은 말해도 되지 않느냐”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그 사람의 이름을 말하기 시작했다.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변화였다.
그다음에는 어느 순간 그 사람이 ‘그 여자’가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그 사람’이었다가,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고, 다시 ‘그 여자’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드라마를 보다가 그 사건과 비슷한 느낌을 불러오는 장면을 만났을 때 나도 모르게 속으로 말했다.
‘미친 그 여자.’
말을 내뱉고 나서 순간 생각했다.
‘내가 너무 거칠게 말했나?’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오히려 지금까지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잘못도 인정하고, 상대의 입장도 생각하고, 어느 한쪽만 탓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어쩌면 나는 그 사건을 너무 얌전하고 공정하게 보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잘못했다. 그러니 이 사건은 별것 아닐 수 있다.
그렇다면 상대방을 굳이 특정할 필요도 없다.’
이런 흐름 속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겉으로 보면 매우 객관적인 태도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객관성 안에서 내가 너무 많이 빠져 있었다.
내가 얼마나 억울했는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얼마나 수치스러웠는지를 빼놓은 채 사건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나를 지키기 위해 너무 잘 정돈된 방식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나만의 생존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감정을 날것 그대로 느끼는 것보다 사건을 정리하고,
내 잘못을 찾아내고, 상대의 입장을 생각하고, 모든 것을 적당한 크기로 만들어 놓으면 견디기가 쉬웠을 것이다.
나는 내담자들에게 날것의 감정을 표현해도 된다고 이야기해왔다.
화가 나면 화난 마음을 만나고, 억울하면 억울함을 느끼고, 수치심이 있다면 그것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해왔다.
그런데 정작 나는 내 마음 앞에서 체면을 차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객관적인 사람이고 싶었고, 공정한 사람이고 싶었고,
상대를 함부로 비난하지 않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래서 나 자신에게조차 너무 얌전한 사람으로 남으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올해 초부터 그 사건을 조금씩 작업하면서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새로운 풍선은 처음 불기가 어렵다.
고무가 굳어 있어서 아무리 바람을 넣어도 잘 부풀지 않는다.
하지만 한 번 크게 불었다가 바람을 빼고 나면 다음부터는 훨씬 쉽게 부풀어 오른다.
마음도 그런 것 같다.
처음에는 감정이 억압되어 있어서 그 감정의 크기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몇 번의 작업을 거치면서 마음이 조금씩 풀리고, 더 깊은 층위에 닿게 되면 오히려 분노가 더 강해질 수 있다.
그것은 새로운 분노가 생긴 것이 아니라, 그동안 마음에 들어오지 못했던 분노가 이제야 들어올 자리를 얻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오늘 아침 드라마의 장면이 그 자리를 건드렸다.
이번에는 그 감정이 들어올 공간이 있었다.
그래서 ‘미친 그 여자’라는 말이 나왔던 것 같다.
그 말이 객관적으로 좋은 표현인가를 따지는 것보다,
그 말 안에 들어 있는 날것의 감정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더 중요할 것 같다.
분노가 객관성을 잃게 만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동안 내가 객관적이라고 생각했던 시선에서 빠져 있던 나의 경험을 다시 사건 안으로 가져다 놓은 것이다.
나는 내 잘못을 볼 수 있다. 동시에 상대의 잘못도 볼 수 있다.
상대를 이해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상대의 행동을 축소할 필요는 없다.
공정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화를 내지 않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진짜 객관성이란 감정을 빼고 보는 것이 아니라, 감정까지 포함해서 전체를 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음의 작업은 감정을 없애는 일이 아닌 것 같다.
다시 소환되지 않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비슷한 장면을 만나면 과거의 감정은 다시 찾아올 수 있다.
다만 예전과 달리 그 감정을 담아낼 수 있는 공간이 생기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 사람’이라고 부르며 사건을 작게 만들었다.
그러다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되었고, ‘그 여자’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은 ‘미친 그 여자’라고까지 말했다.
그 과정은 어쩌면 한 사람을 부르는 호칭의 변화가 아니라,
내가 그 사건을 바라보는 자리의 변화였는지도 모르겠다.
그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 이름을 부르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 때문에 사건 전체를 축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그 사건 안에 나의 억울함도, 분노도, 수치심도 함께 놓아볼 수 있다.
마음이 회복된다는 것은 더 이상 화가 나지 않는 것이 아닐 것이다.
화가 나도 괜찮고, 억울해도 괜찮고, 때로는 조금 거칠게 말해도 괜찮은 것.
그리고 그런 나를 다시 심판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것.
어쩌면 마음에 들어갈 자리가 생긴다는 것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살아남기 위해 나를 너무 잘 정돈했던 내가 이제는 조금 흐트러진 채로도 괜찮아지는 것.
체면을 내려놓고도 무너지지 않는 것.
얌전하지 않은 감정까지도 내 마음 안에 들어올 자리를 마련하는 것.
그렇게 마음의 공간이 조금씩 넓어지면,
과거의 감정이 다시 찾아와도 그것은 더 이상 나를 집어삼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경험이 된다.
그리고 그 자리에 비로소 새로운 마음이 들어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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