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워진 셔츠를 버리지 않는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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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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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일본 드라마를 보다가 한 대사에 마음이 오래 머물렀다.
“알고 있어. 조금씩 잘못하고 있었던 거.
더러워지기 전에 버리고, 새것을 사고.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더럽히고 싶지 않고, 버리고 싶지도 않게 되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옷은 입고 살아가다 보면 더러워진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옷이 더러워지는 것 자체가 견디기 어려운 일이 될 수 있다.
얼룩이 생기면 빨아 다시 입기보다 버리고 새것을 사는 것이 익숙해지는 것이다.
관계도 그런 것 같다.
어린 시절 부모의 기대를 많이 받으며 자란 아이들이 있다.
부모가 “너를 믿는다”는 의미로 건넨 기대는 아이에게 기쁨이기도 하다.
“엄마가 나를 믿는구나.”
“나는 엄마에게 중요한 사람이구나.”
그래서 아이는 잘하려고 한다.
공부를 잘하고, 부모가 원하는 목표를 향해 노력하고,
가능한 한 부모를 실망시키지 않는 아이가 된다.
그런데 기대에 부응하는 일이 오랫동안 이어지면 어느 순간 기대는
사랑의 표현을 넘어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잘하면 괜찮은 나이고,
성공하면 자랑스러운 나이고,
기대를 충족하면 사랑받을 만한 나인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흔들린다.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고, 시험에 실패하고,
진로가 생각대로 되지 않고, 더 이상 이전처럼 잘할 수 없게 된다.
이때 어려운 것은 실패 자체가 아닐지도 모른다.
실패한 나를 부모 앞에 가져가는 것,
그리고 그 모습을 관계 안에 그대로 두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다른 목표를 찾기도 한다.
새로운 곳으로 떠나기도 한다.
새로운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시작하기도 한다.
이전의 나를 모르는 곳에서는 다시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소가 바뀌어도 마음속에 있는 질문은 따라온다.
“나는 지금도 기대받을 만한 사람인가?”
새로운 곳에서 또 누군가의 기대를 받으면 처음에는 힘이 난다.
그러나 그 기대를 감당하기 어려워지는 순간 다시 피하고 싶어진다.
이렇게 보면 어떤 사람의 반복되는 이동이나 목표의 변경은 단순한 변덕이 아니라
기대에 미치지 못한 자신을 직면하지 않기 위한 방법일 수도 있다.
그 사람에게는 실패를 견디는 것보다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더 익숙한 것이다.
그러나 삶에서 계속 새로운 셔츠로 갈아입을 수는 없다.
언젠가는 지금의 나를 가지고 관계 속에 남아 있어야 한다.
성공하지 못한 나,
부모가 기대했던 길을 가지 않는 나,
평범한 일을 하는 나,
때로는 아무것도 잘하지 못하는 나.
그런 나를 보여주면서도 관계가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착한 아이’도 여기에서 다시 볼 필요가 있다.
누구나 엄친아, 엄친딸이 될 수는 없다.
그러면 적어도 착한 아이라도 되려고 한다.
부모를 걱정시키지 않고, 실망시키지 않고, 말 잘 듣고,
자신의 욕구를 뒤로 미루면서 관계를 안전하게 유지한다.
그렇게 자란 사람에게는 자기 욕구보다 타인의 기대가 먼저 보일 수 있다.
누군가가 실망한 표정을 지으면 내가 잘못한 것 같고,
누군가가 슬퍼하면 내가 선택을 잘못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상대의 감정과 나의 선택은 반드시 하나로 묶여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엄마가 내 선택을 아쉬워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아쉬움이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엄마가 슬퍼할 수 있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번 돈으로 여행을 갈 수도 있다.
상대가 실망하는 것과 내가 실패한 사람인 것은 다른 이야기다.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 구분을 배워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나는 누군가의 기대를 받을 수 있지만, 그 기대를 모두 충족시킬 의무는 없다.
누군가에게 실망을 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관계에서 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더러워졌다고 해서 나 자신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실망시키기도 한다.
때로는 내가 기대했던 나의 모습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그때 관계를 버리거나 나 자신을 버리는 대신, 얼룩을 바라보고 닦아볼 수 있다.
깨끗한 셔츠를 새로 사는 것보다 오래 걸릴지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그 과정에서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 있다.
더러워져도 다시 입을 수 있다는 것.
기대에 미치지 못해도 관계 안에 있을 수 있다는 것.
실망을 주어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깨끗하지 않은 모습의 나도 여전히 나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우리는 모두 살아가면서 조금씩 더러워진다.
중요한 것은 얼룩 하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진 셔츠를 버리지 않고 다시 입어보는 연습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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