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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젖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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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
작성일26-08-29 13:01 조회3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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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한 번은 다른 지역에 있는 친척집 행사에 참석한 적이 있다.


평소 집에서 먹던 음식과는 다른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낯설었지만 용기를 내어 먹어보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입에 맞지 않았다.


아마 그때 나는 처음으로 알았던 것 같다.


익숙한 음식과 낯선 음식은 단순히 맛의 차이만은 아니라는 것을.


집에서 먹던 음식에는 맛뿐 아니라 익숙함과 편안함이 함께 들어 있었다. 

엄마가 해준 음식은 배를 채우는 음식이면서 동시에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집을 떠나 독립하고 나서는 새로운 음식을 먹으며 살았다.


처음에는 낯설고 입에 맞지 않는 것도 있었지만, 하나씩 경험하면서 나에게 맞는 음식들을 찾아갔다. 

그러다가 가끔 집에 가면 엄마가 해주던 음식을 먹었다.


그때의 엄마 음식은 더 이상 내가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음식이 아니었다.


그리움과 추억으로 먹는 음식이 되어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첫 번째 젖떼기 이후의 삶인지도 모른다.


아이는 엄마의 젖과 음식에서 조금씩 떨어져 나와 세상에 있는 다양한 음식을 먹으며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신이 무엇을 먹을지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또 하나의 젖떼기가 필요한 것 같다.


나는 그것을 두 번째 젖떼기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 젖떼기가 엄마의 젖과 음식으로부터 몸을 떼어내는 과정이라면, 

두 번째 젖떼기는 엄마가 주는 음식과 정서적 의존으로부터 자신을 조금씩 떼어내는 과정이다.


성인이 되어 부모와 물리적으로 떨어져 살고, 

결혼해서 새로운 가정을 이루었는데도 중요한 일이 생길 때마다 부모에게 묻고, 

부모의 판단을 자신의 판단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부모가 해주는 음식과 방식이 아니면 불편해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 엄마 반찬 아니면 입에 안 맞아서 못 먹겠어.”


엄마의 반찬을 좋아하는 것이 문제라는 뜻은 아니다.


부모가 해주는 음식을 먹는 것은 얼마든지 따뜻하고 좋은 일이다. 

문제는 그것이 “엄마가 해주는 것 외에는 나는 잘 살아갈 수 없다”​는 의미가 될 때다.


두 번째 젖떼기는 엄마의 음식을 끊는 것이 아니다.


엄마가 차려준 음식만 먹지 않고, 내가 내 삶의 음식을 선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음식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부모가 생각하는 방식, 

가족을 사랑하는 방식,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 

돈을 사용하는 방식, 

부부가 역할을 나누는 방식에도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음식’이 들어 있다.


결혼을 하면 우리는 각자의 원가족에서 먹어온 음식과 살아온 방식을 가지고 새로운 식탁에 앉는다.


어떤 집에서는 아버지가 경제적인 책임을 전적으로 맡고, 

어머니가 집안일과 가족을 돌보는 역할을 한다. 

아이는 그것을 보며 자라면서 그것을 하나의 자연스러운 가족의 모습으로 배운다.


그러다 자신이 결혼하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맞벌이를 하는 부부라면 두 사람 모두 경제활동을 하면서 가사를 나누어야 할 수 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어린 시절 보았던 가족의 모습을 ‘좋은 가족의 기준’으로 가지고 있다면, 

그 기준이 배우자에게 자연스럽게 기대될 수 있다.


“왜 집이 이렇게 지저분하지?”

“왜 가족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아?”


겉으로는 이런 갈등처럼 보이지만, 그 밑에는 어쩌면


“가족이라면 이렇게 해야 한다.”


라는 원가족의 모델이 놓여 있을 수 있다.


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가족을 사랑하는 방식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이미 충분히 가족을 책임지고 있는데 또 다른 역할까지 요구받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래서 결혼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더 잘못했는지를 찾는 것보다,


“내가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모습은 어디에서 배운 것인가?”


를 살펴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부모가 그렇게 살았다는 것은 그 시대와 그 가족에서는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배우자는 부모가 아니고, 지금의 가정은 부모의 가정이 아니다.


새로운 두 사람이 만든 새로운 가정이다.


그러므로 결혼은 원가족의 방식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원가족에서 배운 것 가운데 무엇을 가져오고 무엇을 새롭게 만들 것인지 선택하는 과정일 수 있다.


“우리 집에서는 이렇게 했는데.”


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 집에서는 이렇게 했구나.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볼까?”


로 넘어가는 것이다.


엄마의 식탁을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 식탁에서 먹었던 음식의 맛을 마음속에 간직한 채 새로운 사람과 우리의 식탁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문제는 이 두 번째 젖떼기가 첫 번째보다 오히려 어려울 때가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 젖떼기에서는 아이가 자라야 하기 때문에 부모가 어느 순간 젖을 떼야 한다. 

아이도 울고 부모도 힘들지만, 결국 아이가 다른 음식을 먹으며 살아가도록 놓아주어야 한다.


그러나 두 번째 젖떼기에서는 부모와 자녀 모두가 서로를 붙잡고 있을 수 있다.


부모는 자녀가 성장한 뒤에도 중요한 일을 대신 결정해주고, 

어려움을 해결해주며, 계속해서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 만들 수 있다.


그 안에는 사랑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만 있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자녀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부모에게 자신의 존재가 여전히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녀 역시 부모에게 의지하는 것이 편할 수 있다. 스스로 결정하지 않아도 되고 실패에 대한 부담도 줄어든다.


그래서 두 번째 젖떼기는 부모와 자녀 모두에게 어려운 과정이다.


부모는

“네가 나를 덜 필요로 해도 나는 괜찮다.”


를 배워야 하고,


자녀는

“부모가 나를 걱정하지 않아도 나는 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를 배워야 한다.


그렇다고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는 것까지 나쁜 것은 아니다.


사람은 혼자 살아가지 않는다. 

부모에게 반찬을 얻어먹을 수도 있고, 어려울 때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부모 역시 성인이 된 자녀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가가 아니라,


도움을 받지 않고도 자기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일 것이다.


“엄마 반찬이 좋아.”

와


“엄마 반찬이 아니면 나는 못 먹어.”

는 다르다.


“엄마에게 의견을 물어본다.”

와


“엄마가 결정해주지 않으면 나는 결정할 수 없다.”

도 다르다.


건강한 관계는 서로 의지하지 않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에게 기대면서도 자기 삶의 결정권을 잃지 않는 관계일 것이다.


이것은 상담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처음 상담실에 오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조차 모를 때가 있다. 

그래서 상담자는 손을 잡아주고,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발판을 놓아준다.


하지만 상담의 목적은 상담자의 손을 계속 잡고 살아가게 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처음에는 상담자를 자주 찾아야 할 만큼 마음이 힘들고 혼자 감당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다가 조금씩 자기 힘이 생기면 상담 간격도 넓어질 수 있다.


일주일에 몇 번에서 일주일에 한 번으로, 다시 2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으로.


상담자가 갑자기 손을 놓는 것이 아니라,


내담자가 혼자 걸어갈 수 있는 만큼 조금씩 손을 느슨하게 놓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상담자에게 묻지 않고도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관계에서 자기 몫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그때 상담자는 더 이상 매주 만나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필요할 때 다시 찾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된다.


나는 이것이 상담에서의 두 번째 젖떼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상담자가 내담자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상담이 잘 이루어질수록 그 영향은 점차 내담자의 자기 영향력으로 돌아가야 한다.


처음에는

“선생님,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라고 묻던 사람이 어느 순간

“저는 이렇게 해보려고요.”


라고 말하게 되는 것.


그리고 마침내

“이번에는 제가 한번 해보고, 정말 어려우면 다시 올게요.”


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상담이 내담자에게 건네줄 수 있는 독립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상담자가 계속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상담자 없이도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손을 놓는다는 것은 버리는 것이 아니다.


“네가 이제 혼자 걸을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는 뜻일 수 있다.


상담자도 내담자가 더 이상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을 서운해하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상담의 중요한 성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혼자 살아가지 않는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어떤 사람은 상대에게 영향을 많이 미치는 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고, 

어떤 사람은 그 영향 속에서 자신을 맞추는 사람으로 살아간다.


처음에는 자연스러운 관계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위치가 지나치게 굳어지면 한 사람은 너무 많은 책임을 지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힘을 잃을 수 있다.


그래서 건강한 관계란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도 각자의 자리를 잃지 않는 관계인지도 모른다.


나는 상담을 하면서 마음의 짐을 많이 지고 살아온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이들은 흔히 사회적으로 ‘착한 사람’이다.


부모의 걱정도 자신의 몫처럼 지고, 배우자의 감정도 책임지고, 가족의 기대도 저버리지 않으려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모르게 된다.


그래서 상담에서는 그 짐을 무조건 내려놓게 하기보다 묻는다.


“이것은 정말 당신의 몫인가요?”


그리고 각자가 자기 몫을 다시 찾아가도록 돕는다.


좋은 것도 너무 많이 받아들이면 체할 수 있다.


사랑도, 기대도, 보호도, 좋은 말도 내가 소화할 수 있는 양을 넘어오면 마음에 체증이 생길 수 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젖떼기는 단순히 부모에게서 떨어지는 일이 아닐 것이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내려놓고, 내가 소화할 수 있는 만큼 받아들이며, 내 삶의 음식을 스스로 선택하는 일.


엄마가 해준 음식은 여전히 맛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만 먹어야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엄마의 음식도 먹고, 새로운 음식도 먹고, 때로는 내가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엄마 음식은 여전히 좋아. 하지만 이제 나는 내가 먹을 것을 선택할 수 있어.”


어쩌면 그것이 두 번째 젖떼기가 완성된 모습인지도 모른다.


익숙한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것만으로 살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갖는 것.


그리고 상담도 결국 그곳을 향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상담자가 주는 답을 계속 먹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삶의 음식을 스스로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사람으로.


부모가 차려준 식탁을 떠났다고 해서 부모와의 관계가 끝나는 것이 아니듯, 

상담자의 손을 놓았다고 해서 상담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때부터 관계는 조금 달라진다.


의존에서 상호의존으로,
대신 살아주는 관계에서 서로 돕는 관계로,
붙잡는 관계에서 서로의 삶을 존중하는 관계로.


어쩌면 두 번째 젖떼기란 결국,


내 삶을 내가 살아갈 수 있으면서도,
필요할 때 서로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엄마의 젖을 떼었다고 엄마가 필요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듯, 

두 번째 젖을 뗀다고 부모가 필요 없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제는 안다.


엄마의 음식이 아니어도 나는 살아갈 수 있고, 엄마의 결정이 아니어도 내 삶을 선택할 수 있으며, 

부모의 식탁을 떠나서도 나의 식탁을 차릴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진짜 독립은 그때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엄마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엄마에게서 받은 것을 내 것으로 소화하여 마침내 나의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두 번째 젖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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