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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에 묻어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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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원심리상담센터
작성일26-08-30 09:49 조회2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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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말을 듣다 보면 문장의 내용보다 이상하게 마음에 남는 것이 있다.


분명 틀린 말은 아닌데 불편하다.


나쁜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고 하는데 어딘가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들린다.


말을 다시 떠올려보면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그 말을 들었을 때의 느낌은 남아 있다.


아마 사람은 자신이 생각한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만들어내고 있는 마음의 상태까지 함께 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생선을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나고, 향을 싼 종이에서는 향내가 난다.


종이는 자신이 무엇을 싸고 있었는지 말하지 않지만, 그 흔적은 남는다.


사람의 말도 그런 것 같다.


말에는 그 말을 만들어낸 사람의 마음이 묻어난다.


서운함이 있으면 서운한 기색이 묻어나고, 우월감이 있으면 어딘가 내려다보는 느낌이 난다. 

불안도, 두려움도, 공격성도 말 사이에 흔적을 남긴다.


그런데 정작 말한 사람은 그것을 잘 모를 수 있다.


“나는 그런 뜻으로 말하지 않았는데.”


정말 그럴 수도 있다.


자신은 사실을 말했을 뿐이고, 걱정해서 한 말이며, 가볍게 한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의도하지 않았다는 것과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사람마다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은 다르다.


어떤 사람은 직접 말한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요.”


어떤 사람은 침묵한다.


불편해도 참고, 화가 나도 삼키고, 싫어도 괜찮은 척한다.


또 어떤 사람은 직접 말하는 대신 우회한다.


말투에 빈정거림이 묻어나기도 하고, 일부러 일을 늦추거나 상대가 곤란해질 만한 행동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것을 수동공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가 본질적으로 옳고 다른 하나가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관계의 방식대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직접 말해도 괜찮았던 사람과, 직접 말하면 관계가 위험해졌던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말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에게 “싫어요”는 자연스러운 자기표현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오랜 시간 배우지 못했던 말일 수도 있다.


“저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요.”


라고 말했다가 까다롭다는 평가를 받았던 사람이라면, 다음부터는 직접 말하지 않는 방법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말하지 못한 마음은 침묵이 되거나, 말투가 되거나, 우회적인 행동이 된다.


한때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에게 작은 방식으로 저항하거나 상대를 곤란하게 만들 방법을 여러 가지로 이야기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그때는 ‘사람이 저런 일에 저렇게까지 머리를 쓰는구나’ 싶었다.


수동공격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어떻게 하면 상대를 곤란하게 만들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내가 드러나지 않을지, 어디까지 해야 할지를 계속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어쩌면 그런 쪽에는 에너지를 거의 쓰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그것을 말과 행동으로 우회해서 표현하는 방식이 너무 뻔하게 보이면 조금 답답했다.


‘왜 저렇게까지 하지?’


하는 마음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안에는 약간의 반항심도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저렇게 가면을 쓰고 싶지 않다.


차라리 직접 말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사람의 입장도 조금 다르게 볼 수 있다.


그에게는 그 가면이 위선이면서 동시에 보호막이었을 수도 있다.


직접 말하면 위험했던 사람에게 우회적인 표현은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었을 테니까.


그래서 수동공격을 이해한다고 해서 그것을 좋은 방식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지만, 

그 행동이 그 사람에게 어떤 기능을 해왔는지는 볼 필요가 있다.


사람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 익숙한 표현 방식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늘 같은 방식으로 표현했던 것은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침묵했고, 어떤 상황에서는 우회했고, 어떤 순간에는 직접 드러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직접 말해도 괜찮다고 판단했던 장면에서, 상대는 그렇지 않았던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이 정도는 이야기해도 괜찮겠지.”


라고 생각했지만, 상대에게는 그 말이 부담스럽거나 공격적으로 느껴졌을 수도 있다.


예전에 한 교육 자리에서 나의 표현을 듣고 누군가가 “따진다”고 말했던 기억도 있다.


당시에는 상당히 기분이 나빴다.


나는 따진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내 생각을 말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다시 그 기억을 바라보니, 내가 특별히 공격적인 사람이어서라기보다 

서로 다른 표현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환경에서는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어떤 환경에서는 겉으로 동의하고 불편한 것은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관계를 유지하는 방식일 수도 있다.


그런 곳에서 직접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사람은 오히려 “따진다”거나 “세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그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이 있다.


내게 자연스러운 표현이 상대에게도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반대로 상대의 우회적인 표현이 내게 답답하게 느껴진다고 해서, 

그것이 그 사람에게도 쓸모없는 방식이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


문제는 표현 방식의 차이가 힘의 불균형이 있는 관계에 놓일 때 더 커지는 것 같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상사와 부하처럼 한쪽이 더 많은 결정권과 영향력을 가진 관계에서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범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두고


“나는 너를 딸처럼 생각해.”


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말에는 진짜 애정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여전히 같은 위치에 있지 않다.


친밀감을 말한다고 해서 관계의 힘의 차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상사도 마찬가지다.


“나는 직원들과 편하게 지내는 사람이야.”


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자신에게 존중받는 방식으로 대해주기를 기대할 수 있다.


본인은 열린 상사라고 생각하지만, 

부하는 여전히 그 앞에서 조심하고, 눈치를 보고, 때로는 머리를 조아려야 편안할 수 있다.


이때 말과 관계의 위치 사이에 간격이 생긴다.


말은 수평적인데 관계는 수직적이다.


아마 사람들은 바로 그 간격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말의 내용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불편함이 생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중요한 것은 직접 말하느냐, 침묵하느냐, 우회하느냐가 아닌 것 같다.


수동공격을 한다고 관계가 반드시 지켜지는 것도 아니고, 침묵한다고 지켜지는 것도 아니다.


직접 말한다고 반드시 관계가 깨지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깨질 관계는 어떤 방식으로든 깨진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 관계가 드러나고, 어떤 방식으로 서로의 마음을 만나게 되는지가 달라질 뿐이다.


결국 필요한 것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기술보다 일치적인 표현인지도 모른다.


내가 느끼는 것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상대를 배려하고, 내 뜻을 분명하게 말하면서도 상대의 공간을 빼앗지 않는 것.


나도 존중하고 타인도 존중하면서, 상황에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


그것은 언제나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때로는 기다리는 것이 더 적절할 수도 있고, 말을 아끼는 것이 배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침묵하면서 마음속에 원망을 쌓아두지는 않는 것.


돌려 말해야 한다면 상대를 찌르기 위한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


직접 말해야 한다면 상대를 굴복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정직하게 전하기 위해 말하는 것.


아마 그것이 일치적인 표현에 가까울 것이다.


사람의 말에는 그 사람의 마음이 묻어난다.


하지만 한 사람은 자신이 한 말보다 크다.


한 문장에 서운함이 묻어났다고 그 사람이 서운한 사람인 것은 아니고, 

한마디에 우월감이 느껴졌다고 그 사람이 늘 우월한 사람인 것도 아니다.


그저 그 순간 그 사람이 담고 있던 것이 말에 조금 묻어났을 뿐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말을 들으며 불편함을 느꼈을 때에도,


“나는 이 말에서 이런 느낌을 받았다.”


라고 머물 수 있으면 좋겠다.


그 다음에


“그렇다고 이것이 이 사람의 전부인지는 아직 모른다.”


라고 한 걸음 물러서는 것.


그 여백이 있으면 우리는 상대를 단정하지 않으면서도 내가 느낀 것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나 자신의 말도 돌아볼 수 있다.


나는 지금 무엇을 담고 이 말을 하고 있는가.


내가 자연스럽게 표현한 것이 상대에게는 어떻게 들릴까.


나는 내 마음을 지키면서도 상대의 마음이 들어올 공간을 남겨두고 있는가.


말을 잘한다는 것은 어쩌면 말을 예쁘게 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 마음과 말과 행동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지 않도록 하는 것.


나를 잃지 않으면서도 상대를 함부로 밀어내지 않는 것.


결국 일치적인 표현이란,


나도 존중하고 타인도 배려하면서, 지금 이 관계와 상황에 맞는 방식으로 내 마음을 표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말에는 마음이 묻어난다.


그러니 말을 바꾸기 전에 마음을 보고,
상대를 판단하기 전에 내가 들은 것을 보고,


그리고 내가 말을 꺼내기 전에 내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한 번 바라보는 것.


그때 비로소 말은 마음을 감추는 가면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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